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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에게 보내는 편지
보리야.
이름 정할 때 기억나?
직장동료가 그런 말을 했어.
“먹는 걸로 이름 지으면 오래 산대.
밥처럼, 떡처럼, 오래 같이 있는 이름이래.”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어.
만두도 떠올려 보고, 쌀도 떠올려 보고, 밤도 떠올려 봤는데..
자꾸만 내 입에 맴도는 건 ‘보리’였어.
밥에 넣으면 구수해지고,
차로 끓이면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곡식.
조용하지만 든든한 느낌이
왠지 네가 될 고양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처음 너를 안고 온 날
나는 아주 살살,
“보리야.” 하고 불렀어.
그 한 번의 부름 안에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마음을
잔뜩 눌러 넣으면서.
사실, 사료 하나 정착하는 데도
몇 달은 걸렸지, 아마.
이것도 먹여 보고, 저것도 먹여 보고,
배가 살짝 뒤틀린 날도 있었고,
입맛에 안 맞는지
코로 툭 치고 돌아서던 날도 있었어.
그때마다 나는
“보리야, 이것도 아니야? 그럼 이건 어때?”
이렇게 계속 바꿔 가며
너한테 제일 잘 맞는 밥을 찾는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시간 동안
네 배에도, 네 몸에도
괜히 부담을 준 건 아닐까 싶어.
지금 돌아보면
그 사료 정착하는 몇 달 동안
어쩌면 제일 많이 고생한 건
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바로 너였을 거야.
그래서 그 부분이
조금 미안하게 마음에 남아.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신중히 골라줄걸.
괜히 너 배 아프게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나.”
이런 생각도 가끔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게 뭔가를 줄 때마다
한 번도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
좋은 사료를 고르고,
간식을 하나 더 집어 들 때도,
새 장난감을 카트에 넣을 때도,
“이건 그냥 보리 몫이니까.”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거든.
한동안은 고양이 밥 먹이는 기계도 썼지.
사료가 와르르 쏟아질 때마다
너는 우다다 달려가서
배가 동그래질 때까지 와삭와삭 먹었어.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제일 또렷해.
작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이건 전부 내 거다냥” 하는 얼굴로
사료통 앞에 붙어 있던 너.
그래서인지
이 어묵집 그림 속,
빨간 망토 소녀 옆에 앉아 있는 크림색 고양이를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네 이름이 떠올라.
겨울밤, 따끈한 국물 냄새나는 곳에서
눈 반쯤 감고 앉아 있는 고양이.
먹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는
언제나 배부르고,
천천히, 오래오래 씹어 먹을 시간이
충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보리야.
사료 하나 정착하는 데도
몇 달을 돌아 돌아가게 해서,
그 시간 동안 너를 조금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어.
그래도 네가 사료를 와삭거리며 먹던 그 소리,
행복한 얼굴로 그릇을 비우던 모습들을 떠올리면
결국 마지막에는 고마움이 먼저야...
내가 너를 사랑한 것보다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준 것 같은 고양이, 보리.
오늘은 이렇게 편지로라도
다시 한번 불러 본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보다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준 것 같은 고양이, 보리.
언젠가 우리,
메모리 관관소 근처
따끈한 어묵 앞에 마주 앉아서
천천히 맛있게 먹자.
그때도 나는 분명,
너에게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집사일 거야..
안녕.
이제는 슬픔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잘 살아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