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EP. 보리에게 보내는 편지]

-

by 디오소리

보리에게 보내는 편지


보리야.


이름 정할 때 기억나?


직장동료가 그런 말을 했어.


“먹는 걸로 이름 지으면 오래 산대.

밥처럼, 떡처럼, 오래 같이 있는 이름이래.”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어.

만두도 떠올려 보고, 쌀도 떠올려 보고, 밤도 떠올려 봤는데..


자꾸만 내 입에 맴도는 건 ‘보리’였어.


밥에 넣으면 구수해지고,

차로 끓이면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곡식.

조용하지만 든든한 느낌이

왠지 네가 될 고양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처음 너를 안고 온 날

나는 아주 살살,

“보리야.” 하고 불렀어.

그 한 번의 부름 안에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마음을

잔뜩 눌러 넣으면서.


사실, 사료 하나 정착하는 데도

몇 달은 걸렸지, 아마.


이것도 먹여 보고, 저것도 먹여 보고,

배가 살짝 뒤틀린 날도 있었고,

입맛에 안 맞는지

코로 툭 치고 돌아서던 날도 있었어.


그때마다 나는

“보리야, 이것도 아니야? 그럼 이건 어때?”

이렇게 계속 바꿔 가며

너한테 제일 잘 맞는 밥을 찾는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시간 동안

네 배에도, 네 몸에도

괜히 부담을 준 건 아닐까 싶어.


지금 돌아보면

그 사료 정착하는 몇 달 동안

어쩌면 제일 많이 고생한 건

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바로 너였을 거야.


그래서 그 부분이

조금 미안하게 마음에 남아.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신중히 골라줄걸.

괜히 너 배 아프게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나.”

이런 생각도 가끔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게 뭔가를 줄 때마다

한 번도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


좋은 사료를 고르고,

간식을 하나 더 집어 들 때도,

새 장난감을 카트에 넣을 때도,

“이건 그냥 보리 몫이니까.”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거든.


한동안은 고양이 밥 먹이는 기계도 썼지.

사료가 와르르 쏟아질 때마다

너는 우다다 달려가서

배가 동그래질 때까지 와삭와삭 먹었어.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제일 또렷해.

작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이건 전부 내 거다냥” 하는 얼굴로

사료통 앞에 붙어 있던 너.


그래서인지

이 어묵집 그림 속,

빨간 망토 소녀 옆에 앉아 있는 크림색 고양이를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네 이름이 떠올라.


겨울밤, 따끈한 국물 냄새나는 곳에서

눈 반쯤 감고 앉아 있는 고양이.

먹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는

언제나 배부르고,

천천히, 오래오래 씹어 먹을 시간이

충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보리야.


사료 하나 정착하는 데도

몇 달을 돌아 돌아가게 해서,

그 시간 동안 너를 조금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어.


그래도 네가 사료를 와삭거리며 먹던 그 소리,

행복한 얼굴로 그릇을 비우던 모습들을 떠올리면

결국 마지막에는 고마움이 먼저야...

내가 너를 사랑한 것보다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준 것 같은 고양이, 보리.


오늘은 이렇게 편지로라도

다시 한번 불러 본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보다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준 것 같은 고양이, 보리.


언젠가 우리,

메모리 관관소 근처

따끈한 어묵 앞에 마주 앉아서

천천히 맛있게 먹자.


그때도 나는 분명,

너에게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집사일 거야..


안녕.

이제는 슬픔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잘 살아볼게..

keyword
작가의 이전글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