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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조 Nov 05. 2023

무능하고 답답한 능력

대학원생의 성장일기 80

벽돌시리즈 팔 십번째

모임에서 이야길 들어보면 현재의 삶을 보다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많다. 즉 미래를 위한 것보다는, 불확실한 것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자기 현재의 삶에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이야기에 동감하는 편이다. 뉴스에서도 세대를 구분 짓는 용어를 써가며 외계인 보듯이 그런 풍조를 논하기도 한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월급을 부어가며 명품백과 외제차를 사는 사람들과 현재를 즐겨야 나중에도 즐길 줄 안다는 생각등. 미래에 집중하거나 현재에 집중하거나 누구 하나 틀리지 않지만 문득 또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예전의 가치관이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염려랄까? 한마디로 장기적인 안목을 멀리한 채 현재를 너무 소비하다 보면 과연 훗날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다. 물론 양분화해서 다들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지금을 즐겨가며 적금이나 재테크에도 다들 심혈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의 능력에 요 근래 다시 쳐다보게 되고 딴 사람이야기 같았던 것을 이제는 내 삶에 영입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인내"라는 능력이다. 흑백사진 학교에 등장할법한 교실 속 태극기와 나란히 걸린 교훈에 성실, 근면과 같은 하나의 당연한 단어로만 치부했던 인내. 그리고 그렇게 참고 참으면 요즘 세상엔 호구 소리만 듣고,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쟁취해야 하고 답답하거나 무능하다는 생각이 겹치기에 더더욱 비호감이었던 단어였던 인내가 어느 순간 내가 목표로 하는 가치관이 되려고 한다. 수동적인 이미지의 인내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정의 변동, 찰나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관리해줘야 하므로 굉장히 능동적인 이미지로써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역사는 흐리멍덩한 케케묵은 잡담이나 지식 자랑거리가 아니다. 환경이 제아무리 변하더라도 인간사는 변함없다. 전쟁이 없을 것만 같아도 며칠 전만 해도 러시아에서 핵실험 금지조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 하마스 쪽은 전사자가 만여 명이 넘어가는 지금도 이를 증명한다. 흔히 일본을 하나로 뭉친 3명의 영웅을 시대순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나열하는데 어쩌다 인터넷에서 본 아래 글이 떠오른다.


"오다 노부나가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울리려다 이내 실패하면 무참히 베어버리지만, 히데요시는 새 앞에서 온갖 아양을 부려가며 울게 하려고 난리를 떤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글로 보아해선 누가 좋은 것 같나? 이에야스의 기다리는 행동이 누구한테 그 새를 뺏기면 어떡하나 답답하고 미칠 지경일지도 모른다. 그냥 울게 하면 되지. 그래서 히데요시의 행동이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역사는 이에야스의 손을 들어줬다. 단순히 기다렸다고 이에야스가 성공한 건 결코 아니다.


비슷한 비유가 기존에 있긴 한데 내 생각대로 표현해 보자면

천하통일이라는 밥상을 차리기 위해 재료를 어떻게든 모아 온 것은 노부나가요, 재료로 밥 짓고 반찬 만든 것은 히데요시라면 결국 차려진 밥상을 배불리 먹은 건 이에야스다. 그리고 순서상으로 바통터치하듯 동시대 사람들이라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죽고,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일으켜 한몫하려다 이내 죽고 난 직후에야 이에야스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을 통일시키고 안정적인 에도시대를 열게 된다. 물론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각자도생하던 일본 최고권력에 눈이 먼 다른 이들도 득달같이 달려들긴 했지만 이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에서 군대를 징집해서 조선으로 보내려 했을 때 온갖 핑계를 대며 자신의 영역과 힘을 보전한 채로 기다렸다. 그때 당시 히데요시만 눈앞에 보여 어떻게든 출세해보려고 다른 영주들은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치며 충성했지만 결국 끈 떨어진 갓처럼 권력의 분기점에서 이들은 다른 자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대항하다 죽고 말았다.




인내한 자 혹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리는 자들의 성공담은 동서양 통틀어 많이 존재한다. 중국사에서도 초한전 한나라의 유방이 승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 중 하나였던 책사인 소하라는 인물이 있다. 저번 글에서 한신을 언급했지만 한신을 추천하며 자리에 데리고 온 것도 소하였다. 자신의 주군인 유방이 듣도보지도 못한 한신을 반기는 태도가 별 시덥지 않았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신을 대하는 태도가 그따위냐며 대놓고 자기 목숨줄이 달린 주군 앞에 욕을 했던 사람이 소하다. 초한전의 초나라 군주 항우는 전략, 군사적으로도 워낙 뛰어나 유방을 거의 찍어 누르다시피 했을 정도인데 이기고 나서 한숨 돌리려 치면 어디선가 또 다른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한나라를 상대하게 했던 것도 소하가 마련한 보급과 내정능력 덕분 이었다.


망해가던 진의 수도로 입성한 유방과 항우 중 항우의 입김이 월등하다 보니 항우가 결국 그 유명한 위촉오 삼국지중 유비의 땅이 될 한중과 그 주변 지역이 중국 기준에선 베트남과 가까운 산간오지다 보니 지방좌천 수준으로 유방을 보내버렸는데, 유방과 부하들은 단단히 화가 나 항우에 대항해서 싸우고자 했지만 그때 말렸던 이도 소하였다. 소하는 지금은 목숨을 보존하고 나중에 때를 기다려 치라는 말로 유방을 설득시키고 형세가 끝을 모르던 항우의 초나라도 잔인한 학살과 민심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때에 점차 자살골이 되어가자

소하가 뒷받침해 주고 한신과 장량의 화려한 승부차기로 마침내 한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된다.


개인적 차원에서 소하는 통일된 한나라에 기여한 건국공신중 최고의 대우를 받아 어느 누구도 접근조차 힘든 황제 유방 앞에서도 당당히 검을 허리에 찬채 모습을 드러내며 재상의 자리를 유지한다. 건국 초반 숙청의 위기도 있었지만 이 또한 무사히 넘긴채 성공적인 여생을 마친다. 반면 인내로 성공했던 한신은 지역내 왕까지 해보며 맛좀 들이자 점차 오만해져 주군 유방에게 눈도장이 점점 찍혀 말그대로 토사구팽 당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역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지금과 들어맞지 않는 신화적인 이야기라며 승리자에 의해 역사가 왜곡될 수 있고, 현실에 충실하고 적응해 가며 목표했던 바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어떻게 보면 데이터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날로그적인 빅데이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당시의 기록이나 현장사건을 전달하는 과정과 기록자의 해석에 따라 갈려서 최후의 기록이 와전됐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역사가 기록된 바로 흘러왔기에 우리는 역사를 신뢰하고, 공식적인 역사들은 여러 방면으로 교차 검증한다. 초대군주들이나 승리자들은 자기의 행보가 운과 때에 맞추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거대한 역사 속 주인공이 되어 후대에까지 이름이 남겨진다.


어쩌다 인내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보고자 역사까지 들어왔는데, 인내라는 단어가 지겹다면 지극히 일상생활에 부합할 수 있는 공부를 하거나 능력을 기르고자 하는 일련의 모든 활동들이 유지가 되어야만 점점 빛을 발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체험적으로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속에서 우리는 계속 능숙해질 때까지, 원하는 상태에 부합할 때까지 기르고 길러야 하는데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또 자칫 눈앞의 것이 전부다라는 생각에 큰 것을 놓칠수도 있다. 참을성이 없다 생각하던 나는 이제 인내를 길러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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