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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조 Nov 13. 2023

시간 좀 내주실래요?

대학원생의 성장일기 88

벽돌시리즈 팔십 팔 번째

구름 속에 새어 나오는 빛이 참 아름답다. 하늘이 높고 땅은 갑자기 영하의 날씨가 되어버려 코트 입고 멋좀 부리려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다. 가끔 계절 논쟁을 한다. 여름이 좋은지, 겨울이 좋은지. 양자 토론을 지켜보다가 나는 겨울이 되면 여름이 좋고, 여름이 되면 겨울을 그리워하는 쪽에 손을 든다. 봄이나 가을도 있지만 너무 주기가 짧아서 이제는 잊혀져 가고 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북두칠성이 보인다.


가끔 자연이 만들어 낸 광경이나 인간이 표현하는 색감들을 보노라면 뭔가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한참 일상에 파묻혀 살고 있을 때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라도 나보다 넓은, 다른 무언가에 대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또 다른 투자라고 생각한다. 유유자적하거나 여가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이는 시간이 아깝다며 지금은 집중할 때라고 말할 순 있겠다. 시간만 보내고 있는 시간, 그냥 별만 쳐다보는 시간들이 과연 낭비되는 시간일까?


일부러라도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를 챙기는 행위다. 집에 와서 양말 벗고 드러누워도,스마트폰을 하는 것 보다는 그냥 멍 때리듯, 아니면 나가서 영화를 보든, 미술관을 가든 간에 기존의 루틴 외에 벗어나는 다른 것을 해보는 것은 힐링되는 방법이다. 그러면 여행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데, 요즘은 제주도 갈 바엔 일본을 간다거나 아니면 동남아로 다들 잘 다녀온다. 그리고 가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도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비행기를 타본 거라곤 제주도 갔을 때 빼곤 없으니까.


합리화도 해본다. 국내에 수많은 명소와 좋은 데가 많아서 일단은 국내에서 즐기자라고 생각은 한다. 부모님도 바빠서, 나도 바쁘다 보니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그나마 여유를 내본 것은 국내여행이다. 국외로 나간다면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멀리는 못 간다. 다행히 거의 주말마다 외출하는 우리는 이번에는 설악산을 다시 다녀왔다. 요동치는 계절 변화 속에 적응을 못한 나무들이 본래의 색감을 있는 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나무들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시간조차 없어 자기만의 색깔들을 뽐낼 기회가 없어 보였다.

안타깝기도 하고 타이밍을 탓해보지만 주변 산들은 다채롭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김장처럼 푹 익어 맛있는 김치가 되는 것처럼 시간을 자기에게 충분히 쥐어준다면 자기만의 색깔과 맛을 뽐낸다고 생각해 본다. 다들 갓생을 살고 있지만 본인을 위한 시간, 별 다른 노력 없는 그런 시간들도 가져봐야 함을 느낀다.


어찌 보면 20대 내내 대학, 재수, 편입, 군대, 대학원의 시간 속에 상대적으로 나열된 키워드가 많아 보여도 나는 한 게 별로 없다. 있어봤자 벼락치기나 대학교 어디로 갈지 생각만 잠깐 했을 뿐 백수생활로 하루종일 집에 있었던 시간들이 많다. 참 이 시간을 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힘든 시기이기도 하지만 덩달아서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마냥 가만히 있는 것은 무기력의 단초지만 그렇다고 또 나쁜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몇몇 사람들은 뭐라도 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가만히 있으면 머릿속이 비어있어 그것을 견뎌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자신을 못 견뎌하며 친구라도 만나야 하거나 하다못해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어야 맘이 편안하다. 어쩌면 그런 분들에게는 지금의 자신을 온전히 푹 익게끔 시간에 노출시켜 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가만히 있는다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각조차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니까. 색깔이 각기 다른 건 각자의 주어진 환경, 위치, 관점, 능력, 시기 등등 온갖 복잡한 사연과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에 "나는 파란색인데 너는 왜 아직도 초록색이냐"라고 탓한다면 상당히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그 화살을 본인에게 돌리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일지도 모른다. 여유 혹은 생각을 정리하거나 아니면 그냥 일상에서 벗어난 활동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한다는 것은 삶에서 주기적으로 갈아줘야 할 필터 같은 거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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