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ep.04
업무 인수인계는 3일간 진행되었다. 마지막 인계 날, 팀장을 제외하고 과장, 퇴사할 대리, 자금 담당 직원과 나까지 조촐한 송별회를 하였다. 그동안 고생했다는 술잔이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회사 험담이 시작되었다. 8시 출근, 6시 퇴근인데 팀장이 퇴근하지 않는 이상 퇴근은 7시 넘어서해야 한다는 점, 비품 신청은 개인 사비로 해야 한다는 점, 누굴 조심해야 한다는 점,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사내 커플이 되면 여자가 관둬야 한다는 점 등 신입으로 들어온 내게 좋은 정보이면서 조만간 내게 닥칠 미래 같았다. 그런데 더한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날 인사 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전임자가 나갔으니 본격적으로 근로계약서를 쓰자는 거였다. 계약서 조항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입사 첫날, 업무용 노트북을 받았는데 그 노트북 값의 70%를 월급에서 매달 분할하여 빠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집에 있는 노트북을 가져와서 쓰면 될 것 같지만 회사 자체 ERP를 개발하여 쓰고 있어 그걸 감당할 정도의 고성능이어야 한단다. 100만 원이 넘는 가격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떼어갈 쥐꼬리가 어디 있다고 가져간단 말인가. 인사 부장이 나를 관찰하고 있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사에 2개월 전에 합격했지만 회사 사정으로 2개월 딜레이가 있었고, 그 와중에 몇 군데서 면접을 봤는데 오라는 곳이 없었다. 면접 보는 것도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그렇게 입사하자마자 빚이 생긴 것이었다.
노트북도 내 돈 주고 사는 판국에 키보드와 마우스 등 필요한 소모품에 대한 기대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계약서에 사인한 그 당일에 나는 문구점에 가서 필요 물품을 구매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직원 사비로 회사에 속박시키려 하는 거면 그 계획은 아주 성공적인 셈이었다.
새해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완연한 겨울이었다. 나는 회사 화장실을 가기 두려웠다. 화장실과 겨울과 무슨 연관이 있겠냐마는 회사의 또 다른 단점은 추위였다. 회사 로고가 박힌 점퍼를 받았는데 안 입고 싶었지만 사무실이 추워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전기 아끼는 회사라, 그래 그럴 수 있지 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의 냉기는 기본이고(사무실이 추운데 화장실이 따뜻할 리는 없으니), 변기가 내가 아는 그 좌식의 변기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화장실도 추워 좌변기에 엉덩이를 대고 볼일 보는 것도 힘든데, 추운 공간에 내 엉덩이를 띄워 놓는다는 게 과하게 현타가 왔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온열 기능까지 있는 전 회사 비대 변기가 그리웠다. 나는 되도록 참고 참다가 점심시간에 가는 식당 화장실을 이용하였다. 어쩌면 사무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만들어 놓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충분히 그럴만한 회사였다). 연혁이 오래된 회사라 기업 문화가 보수적일 수도 있겠거니 예상은 하였지만 애초에 사옥을 지을 때 좌변기를 놓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내 퇴사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입사한 지 열흘 정도 지나고 신년 회식이 있었다. 그룹 내 임원진들도 참석하는 자리여서 엄숙한 분위기에서 삼겹살을 먹었고 2차는 노가리 집으로 갔다. 다들 술기운이 올라와 분위기가 살짝 느슨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는 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한 임원분이 내게
“직원은 비용이야. 이 말 이해해? 직원이 회사를 위해 성과를 내려면 최소 3년은 있어야 해! 그런데 그, 너 전임자 그놈은 3년 딱 채우자마자 나가버렸단 말이지. 일 다 가르쳐 놨더니 나가? 회사 입장에선 돈만 축낸 거야. 너는 절대 그러면 안 돼!”
퇴사한 전임자에게 못내 서운했는지, 그리고 나도 비슷하게 할까 봐 미리 우려를 표한 걸로 보였다. 직원이 비용이라, 이해는 갔다. 당연히 처음엔 성과를 못 내고 일 배우면서 월급을 받는 꼴이 되니까. 그런데 이걸 대놓고 말하는 사내 분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쉽게 면전에 하는 회사라면 다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메모장 앱에 이 회사를 다녀야 하는 이유 vs 다니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나열해 봤다. 그때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아래와 같다.
다녀야 하는 이유
1. 상장사 회계 일을 배울 수 있다.
2. 밥을 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이마저도 아니면 쓸 게 없었다. 점심시간마다 쿠폰을 받았는데 회사 주변 5개의 식당에서 골라 먹는 거였다)
다니지 말아야 하는 이유
1. 노트북 70% 부담
2. 모든 소모품 개인 부담
3. 화장실 푸세식 변기
4. 세면대 찬물 밖에 안 나옴(양치할 때 이가 시리다)
5. 그냥 회사 자체가 춥다.
6. 사내 연애하고 결혼하면 여자가 그만둬야 한다는 괴기한 소문
7. 직원이 비용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분위기
8. 과하게 보수적인 기업문화
적고 보니 1번부터 이미 다니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였다. 며칠 뒤 나는 입사한 지 2주 만에 퇴사한다고 하였다. 오히려 2주나 걸렸던 점은 노트북을 받았기 때문에 이 노트북 비용을 감당할지 말지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인사팀에서 노트북을 반환하면 없던 비용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입사를 기다린 회사를 2주 만에 퇴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