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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곶 Feb 05. 2022

버들가지에 물오르다

스토리가 있는 꽃 이야기 6

'오징어 게임'으로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한 오영수 배우가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된 '라스트 세션'. 이 연극에서는 구강암으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C.S. 루이스에게 아스피린을 건네달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루이스가 더 강한 진통제는 없느냐고 물으니 프로이트는 "정신이 흐려지는 것은 싫다"며 고개를 젓죠.

프로이트는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보다 진통효과가 떨어질지는 몰라도 명료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던 천연성분의 아스피린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스피린은 단순한 진통제를 넘어 각종 암 및 심장질환과 백내장의 예방, 임신 부작용에까지 효과를 발휘하는데, 해마다 새로운 효능이 추가로 발견될 정도의 명약입니다. 이 아스피린의 주성분인 살리신(Salicin)의 출처가 바로 버드나무입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산모의 통증을 줄이고 열을 내리는데 버드나무껍질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고대 네안데르탈인의 치아 화석을 분석한 결과 치주 농양을 앓던 네안데르탈인이 통증 완화를 위해 버드나무를 씹었던 것이 확인될 만큼 버드나무의 쓰임은 그 역사가 오래됐습니다.

경복궁 향원정 앞의 버드나무

'양치질'이라는 단어의 '양'은 버드나무 양(楊) 자입니다.  치약 칫솔이 없던 시기에 버드나무를 꺾어서 이를 닦았던 생활의 흔적이죠.

히포크라테스나 네안데르탈인을 몰랐을 우리 선조들도 버드나무의 진통효과는 일찍부터 알았기에 민간 치료약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중에 말에서 떨어져 다친 다리를 버드나무 껍질로 싸맨 채 무사히 시험을 마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버드나무의 쓰임새는 곤충의 세계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벌은 집을 지을 때 버드나무의 진액을 사용하여 곰팡이 같은 잡균의 번짐을 막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도 버드나무 판에 그렸기 때문에 다른 그림보다 그 보존 기간이 월등하게 길겠죠?

물오른 버드나무 발을 드린 경복궁 경회루

입춘입니다.

설 연휴에 내려 쌓인 서설이 연이어 불어닥친 찬바람에  녹을 새가 없지만,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버드 나뭇가지에는 벌써 보일 듯 말 듯 연두 물이 오르고 있습니다.

봄이 옴을 가장 먼저 알리는 식물을 혹자는 쑥이라고, 혹자는 매화라고 하겠지만, 는 버드나무를 첫 손에 꼽습니다.

아직도 얼어붙은 운중천 살얼음 밑으로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있지만, 머지않아 보송보송한 털옷이 귀여운 버들강아지가 살랑거리며 이른 봄의 훈기를 전해줄 것입니다.

버드나무 새순이 보송보송한 털옷을 입고 있다

버드나무는 속명인 Salix가 라틴어로 '물 가까이에서 자라는 나무'라는 뜻인만큼  물을 좋아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물과 친한 버드나무를 하늘에 기우제를 드릴 때 주물로 사용하였으며, 지관이 우물 팔 자리를 찾을 때도 유용하게 썼습니다.  

물가의 버드나무는 수많은 잔뿌리로 수질정화작용을 하는 데다가 습지의 침식을 막아주므로 우물가나 연못, 제방 등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능수버들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연둣빛으로 보일 때면 어느덧 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멀리서 보이는 연둣빛이 반가워서 가까이 가보면 가지는 아직도 성마른 나무 빛입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새싹이 버드나뭇가지 전체를 연둣빛으로 보이게 하니 신기합니다.

이것을 "버들가지에  물이 올랐다"라고 표현합니다.

나무들은 지혜롭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을 모두 떨구고 물길을 차단한 채 바싹 마른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은 자칫 수맥에 남은 물로 인해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함이죠. 동장군이 물러가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한 나무가 뿌리부터 슬슬 끌어올린 물을 구석구석에 보내면서 기지개를 켜는 결과가 바로 연둣빛의 물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 모양을 좋아해서 봄을 그린 그림에는 여지없이 물오른 버드나무를 그렸습니다.

버드나무는 봄뿐만 아니라 여름 그림에도 단골 소재입니다.  옛그림에서는 가지를 늘어뜨린 채 시원한 빗줄기를 닮은 모습으로 서있는 버드나무 밑을 나귀타고 지나가는 선비의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임금은 신하들에게 여름을 잘 견디라고 부채를 하사하곤 했다. 단원 김홍도가 부채에 그린 버드나무-출처 간송미술관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담은 조선시대 시조입니다. 지은이는 님에게 꺾은 버들가지를 들려보내면서 창가에 심어두고 버들가지가 뿌리내려 잎이 나면 자신처럼 여겨 달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밤새 내린 비에 새잎이 날'만큼 버드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꺾꽂이 이도 최하입니다. 가지를 거꾸로 꽂아놓아도 버드나무는 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힘차게 물을 빨아들이는 강인한 버드나무의  생명력이 불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탱화속 정병에 버들가지가 꽂힌 모습이 자주 보이며, 정병 장식무늬에도 버드나무 출현은 잦습니다.

고려시대 청동은입사 정병에 등장한 버드나무(출처:국립중앙박물관)

'식목왕' 정조의 버드나무 사용법입니다.

그가 수원화성을 지을 때 수원천변에 능수버들을 심게 해서 수원천은 유천(柳川)이라 불렸습니다. 능수버들은 휘영청 늘어져 신도시 화성에 멋을 더했고, 수원천의 홍수를 막고, 화성을 가로지르는 물을 깨끗하게 정화했습니다. 그가 자립도시 건설을 위해 번영시킨 지동시장, 팔달시장까지 수원천변을 따라 심기운 버드나무 탓에  이 지역 상인들을 (柳商)이라 불렀습니다.

수원화성 축성에 공들인 정조의 핵심포인트는 자급자족 도시이면서 적으로부터 방어 가능한 성, 그리고 빼어난 건축미였습니다.

수원화성의 백미는 방화수류정입니다.

방화수류정은 군사시설이지만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의미를 담아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적을 두렵게 하리라"던 정조의 의도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방화수류정과 5개의 수문 위에 지은 홍화문, 인공연못인 용연 일대에는 그들을 둘러싼  능수버들과 함께 정조가 기획한 아름다움이 형상화 되어있습니다.

버들가지에 물오르듯 푸릇푸릇한 청춘들이 버드나무 가로수를 두른 용연 주변 잔디밭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정조도 흐뭇해하지 않을까요?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본 용연과 버드나무

버드나무가 물기를 힘차게 빨아들여 가지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를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면 속가지를 살살 빼내고 난 버드나무 껍질만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버들피리를 만들어주곤 했어요.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 재미도 선사하면서 천연 아스피린으로 면역력도 높여주던 지혜가 담긴 놀이였죠.

올봄에는 이런 선조들의 지혜를 곱씹어보며 버들피리를 불어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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