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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Jun 29. 2021

나는 왜 은수저로 밥을 먹나?

 나의 할머니는 1910년에 태어나셨다. 물론 돌아가신지 꽤 오래되었다. 꽤나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양반집 첫째딸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지역 명문가 양반 집안 자제라, 어린 시절, 동생들을 데리고 오일장이 열릴 때, 시장 입구에 앉아서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너 여기 뭐 하러 왔냐?” 이렇게 물으면,


“네, 오늘은 산에서 나무한 것 좀 팔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무거운 지게를 지고서도 어린 아이인 할머니에게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장이 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셨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16살에 시집을 가셨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가세는 기울고, 아이들은 자꾸 태어났고, 할머니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져 갔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던 시절이라, 궁핍해도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혼자 떠나셨고, 몇 년 동안 아예 연락이 끊겼다. 할머니는 경찰서를 찾아가 일본 순사에게 매일 할아버지가 사는 곳 주소를 찾아봐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처음에는 상대도 안 해주던 일본 순사가 경찰서 앞에 매일 죽치고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결국 지고 말았다. 참고로 할머니는 그 당시에 일본어를 전혀 모르셨다. 할아버지가 사는 곳의 주소를 일본 본국을 통하고, 통해서 할머니에게 알려주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주소가 적힌 종이와 집안 식구들의 (은)수저만을 챙겨 들고, 나의 고모님들과, 일본 오사카로 가셨다.


왜 수저만을 들고 가셨는지, 내가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몰랐다. 할머니 집안은 오래전부터 대대로, 은수저만을 써 왔다. 은수저는 굉장히 귀중품이었고, 신분과 권위, 부의 상징이었다. 비싼 물건이라는 것 외에도, 할머니와 우리 집안의 정체정을 지닌, 아마도 집안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 다시 귀국할 때도, 가족들의 은수저를 먼저 챙기셨고, 한국전쟁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아니, 아마 그러셨을 것이다. 분명히 오래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몇 번 하셨는데, 매번 귀담아듣지 않아, 지금은 어렴풋이 기억만 난다. 후회스럽다. 당연하게도 우리 가족 모두 은수저를 사용하였다. 나도 젓가락질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은수저를 사용하게 되었다.


수저마다 각각 표시가 있었는데, 부엌칼로 금을 그어서 금 한 개는 아버지, 두 개는 어머니, 이런 식으로 누구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내 것은 X자로 금이 그어져 있었다. 은수저는 꽤나 무겁다. 그리고, 황성분과 닿으면 검게 변한다. 이것 때문에 계란 프라이나 계란 찜이 나오면, 일부러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재밌어 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몇 번 야단도 맞았다.


세월은 흘러서, 내가 결혼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께서 새 은수저를 예물로 주셨다. 와이프 것도 주셨는데, 웬일인지 와이프는 은수저를 사용하지 않는다. 무겁고 손에 익지 않아 불편하고, 수저가 다 그게 그거라고 말할 때, 갑자기 마음 한 켠이 아파오면서, 자꾸 할머니 생각이 났다. 지금도 고향 부모님 집에 가면 내가 8살때부터 썼던 은수저가 그대로 수저통에 있다. X자 금이 그어진 채로. 35년이 넘었는데도, 오래된 물건 같아 보이지 않는다. 동생들 수저도 당연히 수저통에 있다. 우리 가족 모두 이제 각자의 삶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수저만은 한 곳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니, 수저가 잠깐 부럽기도 하고, 내 분신 같이 느껴지고도 한다.


지금도 물론,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나는 은수저를 사용한다. 와이프 말이 맞다. 별다른 게 없는 그저 은수저이지만, 가진 것 하나도 없는 빈궁한 삶 속에서도 끝끝내, 은수저만은 팔지 않고, 지켜낸 할머니의 깊은 뜻과 사랑을 저버리는 일인 것 같아, 도저히 다른 수저를 쓸 수가 없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이젠 은수저를 사용해도 잘 사는 집 양반이 아니지만, 나는 이 조그마한 우리 집 전통을 깨어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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