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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taetae Oct 04. 2022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Our spirit, MERITOCRACY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마치 모두가 능력에 미쳐 있는 것 같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일반적 인간의 삶을 상상해본다. 먼저, 사실상 제일 중요한 순간이 처음이다. 어떤 이의 자식으로 태어나는가. 이에 따라 아주, 매우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모든 것들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게 한 아이는 세상을 마주한다. 안녕, 친구야. 세상을 살아갈 준비는 다 하고 나온 거지? 

  이후 아이는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들은 아이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천재이자 귀염둥이로 여긴다. 아이는 행복하다. 하지만 아이는 곧 시련을 마주한다. '학교'라는 이름의 길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십수 년 간 아이는 능력을 검증받는다. 시험을 보고 또 본다. 그리고 그 시험 성적에 맞추어 적당한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을 진학한 A, 이제 A의 소개 문구에 그 대학 이름이 추가된다. 몇 년이 흐르고, A는 직장에 취업한다. 그렇게 다시 A의 소개 문구에 직업과 직장이 추가된다. A는 죽기 직전까지 소개를 하고 소개를 받고 다닌다. 평가를 받고, 평가를 하고 다닌다. A의 모든 것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오직 그 소개 문구만이 기억될 뿐.

  

  능력주의는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강력하다. 능력주의는 말 그대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그에 맞는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능력이 제일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예를 들어 화장실 배관이 고장 난 것에 대해 이를 가장 잘 고치는 배관공이 소득을 제일 많이 받고, 가장 많이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치과 치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장 치료를 잘하는 치과의사가 우대받아야 한다. 얼핏 들으면 이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조금 애매한 부분이 몇 있다. 먼저 '가장 잘'이다. 능력치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어 수치상으로 표현되지 않는 이상, 그것을 판단하기는 힘들다. 한편, 일반적인 비교가 그렇다.  직업과 직업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여기서 '학력'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마이클 샌델은 윌리엄 싱어가 주도한 2019년 미국 입시비리 사건을 언급한다. 부유한 학부모가 자식을 명문대에 진학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이용해 비리를 저질렀다. 그는 궁금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를. 심지어 미국은 기부입학 등의 제도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앞문, 옆문, 뒷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앞문은 일반적인 문이다. SAT 점수로 입학하는 것과 같은. 그에 비해 뒷문은 기부입학 등의 특례제도를 말한다. 그리고 옆문은 입시 비리를 통해서만이 갈 수 있는, 뒷문처럼 안 보이고 앞문처럼 보이는 문을 뜻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버드에 다닌다고 생각해보자. 어떤가? 일단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서도 엄청나 보인다. 무언가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그가 기여입학제도로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그 환상은 그가 엄청나다기보다 그의 부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환상으로 바뀐다. 마이클 샌델은 앞문과 옆문을 통해 '능력주의의 광채'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소수의 '승리자'들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보상받길 원한다. 그 원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당연한 것들이, 또는 더욱 강력하게 되고 있다. 

  

  능력주의는 소득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많을수록 능력이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역도 성립한다(결혼정보회사를 떠올려 보라!). 능력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능력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희귀하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그만큼 가치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르브론 제임스의 농구를 보러 수 백 달러를 투자하겠지만 나의 농구를 보러 단 돈 1달러도 투자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 명제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능력에 비례하여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겨진다. 돈이 없거나 학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당연시된다.

  이 말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의문을 제기한다. 분명 르브론과 볼트보다 더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절반의 성공도 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고 하며 말이다. 그렇다면 재능의 차이일 것이다. 재능이 있냐 없냐, 혹은 많고 적냐의 차이. 다른 한편으로 그 성공은 '시기'와도 상관있다. 르브론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생각해보면 일단 농구로 그렇게 돈 벌 확률은 극히 낮다. 

  재능과 시기. 이 둘 외에도 여러 변수는 존재하겠지만 마이클 샌델은 이 둘에 집중하여 이를 '행운'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행운과 능력주의가 연결된 순간, 당연시되던 명제가 위태로워진다. 능력이 좋을수록 비례하여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그 명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라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덕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마땅한 것을 받아야 한다는 그 생각은 위력을 잃게 된다. 

  

  사회는 점점 갈라지고 있다. 양쪽으로. 부유한 자들은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가난한 자들은 더 많은 것들을 잃고 있다. 있다/없다의 이분법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불평등하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데에 있다. 아메리칸드림, 우리나라 식으론 개천에서 용 나기. 이 믿음은 수 십 년 간 흔들리지 않았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기우'의 꿈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착각이 되어가고 있다고 마이클 샌델은 지적한다. 즉, 오바마와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주구장창 외쳐왔던 사회적 상승 담론이 사실 불평등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한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A가 만약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 부유함은 A의 삶과 이어질 확률이 높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이면 A는 가난할 확률이 높다. 한창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수저론'을 떠올려보자. 다이아몬드, 금, 은, 동수저. 학생의 입장에서 '수저론'을 처음 접했었는데 그때 만약 내가 부모였다면 이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질까, 생각했었다. 자, 능력주의는 정말 '능력'주의인 것인가.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포퓰리즘의 반격)은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주류 정치인들은 그 원인을 분배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설명은 불충분하다. 이는 정치 사회가 양극화되고, 민주주의가 실종되는 한편 그 자리를 민족주의가 차지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를 원인으로 찾는다.

   60년 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했다. 그리고 걱정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상당히 평등한 사회로 이행하는 것 같지만, 결국 능력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오만을, 패자는 굴욕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승자는 자신을 위대하다고 바라볼 것이며 패자를 깔보게 된다. 한편 패자는 자신을 한탄하며 자기 비하에 빠진다. 즉, 마이클 영에게 능력주의는 이상적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적 불화를 일으키는 제도였다. 

  모두가 알고 있듯 승자는 소수이기 마련이다. 다수라는 단어와 승자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승자는 소수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여겨진다. 그러나 패자는 다수이다. 공동체 또한 다수이다. 패자로 가득 찬 공동체, 모두가 서로를 짓밟고 서로의 위에 올라가려 분투하는 공동체, 승자들은 깨어있는 척, 깨끗한 척 하지만 자기 자식들을 위해 은밀하고 교묘하게 재생산 기제를 만드는 공동체를 떠올려보라. 그 공동체가 과연 건강하다고, 민주적이라고, 물려줄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샌델은 기회의 평등은 당연히 아니고, 결과의 평등은 너무나 잔혹하니, 조건의 평등을 꺼내 든다. 반드시 성공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공동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평등하게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더 관대하고 덜 악의적인 공적 삶으로 변화하자는 것이다. 물론 샌델은 이의 구체적 방안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모두의 몫이기 때문이다. 

  샌델이 묻는다. A를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줄 수 없느냐고. 평생 능력을 검증받다 몇 줄의 소개 문구만 남기고 죽는 것이 아닌 공동체와 자아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게 할 수는 없겠느냐고. 그리고 당신만 말고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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