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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Jan 10. 2023

굳은살

나의 한국 교육 경험기

   나는 독일에서 태어나 어려서 독일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가정 밖 교육을 접했다. 너무 어렸던 터라 희미한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허구한날 유치원 앞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퍼먹거나 지렁이를 잡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이사했다. 언니와 나는 낯선 언어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한국에서의 삶에 적응해 나아갔다. 나는 줄곧 선생님께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나는 12년간의 학교생활 내내 선생님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첫 시험을 보고 선생님은 반의 1등부터 3등까지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아이들의 박수를 받게 했고, 나는 4등을 한 것이 너무 분하여 속으로 학습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수치심은 이후의 학교생활 동안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아등바등했던 원동력의 시발점이었다. 


   제도권 교육에 첫 발을 디뎠던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은 연필 잡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여린 중지손가락에 돋아 오르는 굳은살의 여부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파악했다. 받아쓰기와 따라쓰기 따위의 과제를 하며 나는 굳은살이 더욱 빨리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 연필을 더욱 세게 쥐어 글씨를 쓰곤 했다. 돌이켜보면 12년간의 나의 학교생활은 여린 것들을 짓눌러 모종의 굳은살을 박이게 하는 과정이었다. 공부는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보상은 달았고, 나는 그 달콤함을 좇는 분투가 덜 고통스럽도록 웬만큼 눌러도 아프지 않을, 단단한 굳은살들을 만들어냈다. 


   부모님의 뜻있는 교육방침으로 나는 12년간 스마트폰을 한 번도 손에 쥐어 보지 않고, 학원에도 일절 가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학습하는 힘을 길렀다. 자기주도학습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소위 명문고라고 불리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자사고에서의 학습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도의 경쟁을 동반했다. 나의 친구들은 자기의 몸을 해쳐가며 공부했고, 선생들은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은 수능 뒤로 유예하자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우는 날이 많았고, 분노하는 날이 많았다. 그냥 독일에 남아있었을 수는 없었겠냐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의 준말임을 다소 아프게 깨달으며, 교육이라는 것은 현사회를 유지/경영하기 위해 인간을 동원/통제가능한 형태로 자원화시켜 사회를 재생산하는 강력한 도구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히 무엇을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순간에도, 그렇지 않은 순간에도 학생됨을 올바르게 수행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학습했다. 그리고 그 학생됨이란 국가가 원하는 국민상이나 사회가 원하는 시민상과 원거리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었을 적에 세월호가 있었고,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촛불대선이 있었다. 나는 학교를 바꾸고 싶었다. 친구들이 과열된 경쟁 속에서 그만 자기를 미워하고 학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학내에서 학생들의 입으로 교육을 말하고, 학생됨에 대해 생각하는 자리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학교 내에서 “교육이 문제”라는 말은 너무도 진부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고단한 현실을 개선시키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나는 그때 십여 년간의 학교생활 동안 굳은살이 박이는 자리가 연필을 쥔 손가락 사이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환경속에서 아프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이성복 시인의 문장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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