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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Mar 16. 2024

의미를 찾아 애쓰는 사람들

의미로운* 무의미

*'의미롭다'라는 말은 사전에 없는데, 나는 왠지 '의미있다'보다 '의미롭다'는 말이 더 와닿아서 이 표현을 즐겨쓴다.

사람은 살면서 의미를 찾는 노동을 부단히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산다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존재의 의미'(어쩌면 말자체가 동어반복인. 존재 자체가 의미라고 생각한다면.)를 질문하고 그 답을 찾지 못하면 무의미의 공허를 견디지 못해 자신을 죽이는, 존재하기를 포기하는, 그럼으로써 무의미의 상태로 돌아가는 역설적인 행위를 한다. 

어쩌면 인간만이 그런 행동을 한다. 동물들은 태어나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는 목적 그 자체인 (목적본위의 생명)활동을 성실히 하다가 죽음이라는 또 다른 목적(숙명)을 맞는다.

우리는 무의미를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내 삶과 행동을, 과거를, 누군가와의 만남과 시간을 계속해서 정당화한다. 나는 인간이 이토록 의미화에 집착하는 것이 역으로 우리가 유의미화하려 했던 그것들이 모두 무의미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세상에는 의미롭고 그 자체로 선한 것들 또한 많다. 그런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모종의 미학을 느낀다. 그것이 아름답고 심지어 감동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생각보다 의미 없는 일들도 많다. 만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사람도 있고, 그저 시간낭비이기만 했던 시기도 있으며, 성장 따위 허락하지 않는 악독한 고통은 제아무리 의미를 찾아보려고 해도 그저 파괴적이고 무의미한 고통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때들도 찾아온다. 그것이 우리를 아예 주저앉혀버리는 크나큰 절망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란, 그리고 인간의 생애란 본디 의미와 무의미로 뒤엉킨 것이란 사실에 무던해질 필요가 있다. 

그 어떤 무의미의 조각들도 우리를 아예 텅 비어버리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가장 근원적인 의미가 우리의 존재, 그 자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거나, 삶과 동떨어진 철학적인 정언 따위로 받아들이거나, 오글거리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나를 죽이려고 든' 위기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정말로 위대하다는 사실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시간 끝에 '배움'을 얻거나, 심지어 그래서 '감사'하기까지 할 수 있다면 물론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할지라도 괜찮다. 그 괜찮을 수 있는 힘이 그 파괴가 나에게 궁극의 파괴가 될 것인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무의미에 대한 인정이 그 '괜찮을 수 있는 힘'을 추동한고 믿는다. 

의미는 희귀하다. 우리가 수많은 정당화를 통해 만들어낸 '의미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서 무의미의 만연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것들의 그러한 '의미의 잣대'로 봤을 때 상당히 무의미하다. 때로는 그 무엇도 의미롭지 못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우리를 뒤흔드는 많은 '존재감이 있는 일들'이 있지만, 그들 또한 애석하게 그 어떤 의미대신 그저 지나간 흔적이나 흉터 따위만을 남길 수도 있다.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

무의미의 의미화에 들일 노동력을 생략하고 무의미를 초연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의미와 의미가 뒤섞인 시간과 그것들이 이루는 삶 속에서 양자 모두 비로소 '어떤 의미'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말이다. 

삶은 제법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모든 무의미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만큼, 우리의 생명은 가치롭고 의미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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