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행 표를 얻다
방황의 시간
남극 이야기..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남극으로 떠나기 전, 내 인생의 행복 그래프는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는 강남의 멋진 빌딩 속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운동화와 등산화만 신던 내 발들이 몇 주전 매끈한 새로운 애인(새고도)을 만난 것이다. 겉보기에는 미끈했지만 그녀는 까칠했다. 열심히 세상 구경하며 놀다 온 가난한 사회초년생을 알아본 그녀가 어디 쉽사리 마음을 열겠는가? 무식하게 들이대다 작은 상처를 얻었고, 이른 아침 출근길을 나설 때면 똑같은 부위를 찔러되는 그녀의 공격에 한동안 아픔을 참고 걸어야 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그녀를 만나야 했다. 사랑이 넘쳐 대부분의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상처가 생기고 다시 조금 나아지기를 반복하다 발등의 상처는 나았지만 내부는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루 20만 명이 이용한다는 강남역으로 출근하여, 6시가 되면 눈치를 보기 시작하여 상사가 사무실을 떠나면 퇴근하여 아침보다 더 복잡한 지하철에 몸뚱이를 꾸겨 넣었다.
가끔 회식이라는 것을 했다. 긍정적인 기능을 제외하고 내가 느끼는 회식은 직장인의 고뇌를 식탐을 달래주는 행위, 반복되는 업무와 스트레스에서 허락받은 음주행위, 직장인들의 소극적 집단 일탈 행위, 술로 실험되는 충성도 측정 게임이었다.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주말이면 자의든 타의든 산으로 갔다. 평일 아침, 정장을 걸쳐 입을 때보다, 10년 된 쫄쫄이 입는 것이 훨씬 즐겁고 편안하고 좋았다. 오르막을 오르며 더워지는 몸과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이 나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게 한다. 다른 생명 개체를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초록의 세상이 좋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전생에 나는 타잔이 아니었을까?' 하고.
강남에 출근하는 타잔은 사실 모든 세상이 신기하고 두렵다. 스마트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목을 꺾은 지하철의 사람들도, 컴퓨터 앞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인간들도, 그들 머리에 살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주말 산을 가득 메운 등산객들을 보면서는 서울에 적응한 타잔도 정말 많구나. 감탄하며, 한편으로는 그 많은 사람의 등산화로 인해 상처 입은 나무를 보며 슬퍼한다. 용기를 내어 도시에 온 타잔의 서울탐험에 끝없는 배움이 함께 하길. 두려움보다는 생활 속 작은 것에 기뻐하는 밝은 눈과 감성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본다.
서른이 넘도록 자유로운 삶을 살며, 사무실 일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나에게 많은 것들이 미지의 영역이었고, 컴퓨터 속 엑셀 및 각종 프로그램은 동료가 아닌 적군처럼 느껴졌다.
핑계 같지만 단체가 약속한 네팔 해외지부 설립 계획을 이행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려움을 이겨낼 동력이 없었다. 동기를 상실하여 엑셀 및 여러 녀석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어떤 의욕도 들지 않았다.
회사 내 많은 선후배 직장동료 중, 같은 팀 대리님이 밥을 먹으면서 물어왔다.
"주임님은 열심히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일 계속하고 싶으신 거 맞으세요?"
"회사 동료와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으세요?"
워낙 모르는 것이 많아 여유를 가지고 배우고 싶다며, 부자연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급하게 친해질 필요가 없지 않으냐 대꾸했지만, 나도 그도 내 안에 끈적끈적한 불학실성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불편까지는 아니지만 공기 중 어색함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오늘을 반성해본다.
아침마다 지하철 입구를 나서며 최면을 걸었더랬다.
선택한 것에 책임지자.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자. 최면을 걸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예전에 이겨낸 많은 장애물처럼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내면 어딘가에 금이 가 있었다.
서울 한가운데 직장인이 되고부터 시작된, 내 안의 시꺼먼 혼돈이 육체의 그릇을 넘어 찔끔찔끔 새어 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내면의 진짜 나를 보지 못하게 가면을 쓰고 싶었다. 스스로의 선택에 명확하지 못 한 결정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회사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돈이 없으면 서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떠난 곳, 좋아하지 않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끝없는 고민을 하던 난, 서로를 안녕을 위해 이별을 고하고 다시 자유인이 되었다. 백수로 돌아온 것이다.
보통 때와는 달리 난 완전히 길을 잃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면 즐거울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이제까지 즐거운 삶을 살아온 시간마저 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몇 달을 방황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었지만,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없었다. 예전처럼 현실적인 것들, 경제적인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떠나기엔 배낭을 짊어질 어깨에 힘이 모자랐다.
지쳐가던 어느 날 혼돈으로 깨어진 가면 속으로 새 빛이 들어왔다. 촬영보조 및 각종 알바로 방황의 몇 달을 보내다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예전 오지탐사대를 통해 아프리카 르웬조리를 함께 등반한 유한규 대장님의 전화였다.
"대하야, 남극 가보지 않을래?"
"네, 가고 싶습니다."
이 짧은 산사나이들의 대화는 몇 달의 시간을 거쳐 진짜 남극행 표로 이어졌다.
쭈뼛쭈뼛 감사의 인사를 몇 번 드렸긴 하지만, 이렇게 다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유한규 대장님! "
2008년 훈련을 하며, 탐사를 하며 본 유한규 대장님의 자기관리 능력과 나이를 뛰어넘는 체력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2016년 다시 대장님과 남극에서 함께 보낼 때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산악활동을 하시는 많은 선배들은 과거의 영광을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현실에서는 술과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뱃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타협의 습관화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 대장님은 실천을 위주로 현재를 살고 계셔서 더운 존경스러웠다.
부디, 오래도록 지금처럼 열심히 운동하시고, 대장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방황의 가치
어쩌면 이 전화 한 통으로 남극을 갈 수 있었다고 이렇게 책에 쓴다면 남극을 가보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20살 대학교 신입생 때 시작한 산악활동과 꾸준히 유지해온 체력을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2016년을 가득 채운 '방황'이라는 녀석이 남극행 표를 얻을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라고 본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방황의 가치는 인생이라는 그림에 여백을 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화가가 무엇을 그리기 전, 검은 묵을 잔뜩 머금은 붓을 잠시 놓아두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남극에 가기 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것보다는 자유와 즐거움만을 쫓는 방랑벽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망상은 그저 채우려고만 했던 욕심이었고, 이 욕심은 때가 되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우리들의 식욕처럼 계속해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배낭여행을 떠나고, 산악 원정을 떠나고, 네팔에서 NGO 활동을 하고, 몰디브에서 일하고 어쩌면 이미 많은 경험을 했고 그만큼 여러 가지 그림들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면 새로운 종이를 펼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는 간단한 법칙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에 직장을 선택했다면, 여유롭게 남극에 관한 글을 적고 있지 못할 것이다.
다른 선택을 위해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 여백을 두었기에 남극을 갔다 올 수 있었다. 2016년을 가득 채운 방황의 가치는 2017년 지금의 나를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