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회사에서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회의실, 벽 한쪽엔 커다란 대시보드가 띄워져 있고 숫자와 차트가 빼곡합니다.
50대 임원이 오랜 경험을 근거로 방향을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해서 잘 해왔어.”
그때 20대 후반 주니어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탭니다.
“데이터를 보면… 그 전략은 최근 2년간 효과가 거의 없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회사의 수준을 가릅니다.
1. “자네가 뭘 안다고 그래?”로 끝나는 조직.
2. “그래? 어떤 데이터인지 같이 보자.”로 이어지는 조직.
이 글은 두 번째 장면이 일상이 되는 시대가 왜 ‘생존 조건’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나이가 곧 정보였습니다.
경력 20년이면 과거 신입이 20년 동안 볼 수 없는 상황을 다 겪어본 사람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경력의 길이”보다 “정보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가”가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규제는 1~2년 단위로 바뀌고 기술 스택은 3~5년이면 완전히 갈아엎어지고 소비자 취향은 6개월 단위로 뒤집힙니다.
그래서 사실상 모두가 매년 새로운 산업에 입사하는 “만년 신입”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때 디지털 네이티브인 주니어들은 어릴 때부터 게임·SNS·유튜브·커뮤니티로 세상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체득해왔습니다.
60페이지 보고서보다 5분짜리 숏폼 영상 안에 더 많은 현실감각이 담겨 있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는 세대입니다.
이런 세대에게서 나오는 비판적 피드백은 “버릇없는 말”이 아니라 리더가 가지지 못한 최신 환경 데이터에 가깝습니다.
경험(리더)과 환경 데이터(주니어)를 결합하는 팀이 더 빠르게 진화하고 한쪽만 고집하는 팀은 결국 시장에서 도태됩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리더일수록 신입, 주니어에게 비판적 피드백을 ‘구걸하듯’ 받아야 사는 시대가 온 겁니다.
문제는 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한국 회사에서는 여전히 “말은 다들 맞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안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연공서열 문화
“나이 든 사람은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
“나이 든 사람의 판단은 검증하면 안 된다”로 오염되었습니다.
2. 평가 권력이 위에만 있는 구조
연봉, 인사고과, 승진을 쥔 사람이 피드백을 받는다는 건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 “내가 틀렸다”는 말은 거의 금기입니다.
3. 피드백 = 공격이라는 오해
한국에서 비판은 오랫동안 “사람을 향한 비난”으로 소비되었습니다.
“이 전략은 비효율적입니다”가 “당신은 무능합니다”로 번역되는 문화죠.
결국 조직은 이렇게 중독됩니다.
“불편한 말은 줄이고, 보고서는 깔끔하게, 분위기는 좋게.”
그러다 시장에서 한 번 크게 얻어맞습니다.
고객은 예의가 없고, 경쟁자는 체면을 안 봐주기 때문입니다.
조직 안에서 차단한 비판이 조직 밖에서는 훨씬 더 잔혹한 방식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정리해야 할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비판적 피드백”은 리더를 공격하는 행동이 아니라 조직의 미래를 보존하는 리스크 관리 행위라는 점입니다.
좋은 비판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사람이 아니라 행동과 결과를 향한다
“팀장님이 틀렸어요”가 아니라 “이 전략은 A 데이터를 기준으로 봤을 때 리스크가 크다”에 초점을 맞춥니다.
2. 감정이 아니라 팩트에 기대어 있다
“왠지 아닌 것 같아요”가 아니라 “지난 6개월간 전환율 추이를 보면, 이 채널은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에 가깝습니다.
3. 대안이 함께 따라온다
“이건 별로예요”로 끝나지 않고 “그 대신 이런 실험을 소규모로 먼저 돌려볼 수 있겠습니다” 같은 제안을 붙입니다.
이런 피드백은 리더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리더가 “미리 맞을 비판”을 실내에서 안전하게 맞게 도와주는 방탄조끼에 더 가깝습니다.
밖에서 시장에게 맞으면 손실은 ‘현금’과 ‘신뢰’로 나오지만 안에서 주니어에게 맞으면 손실은 ‘자존심’ 정도로 끝납니다.
시장에 먼저 맞을지 주니어에게 먼저 맞을지의 선택일 뿐입니다.
나이 많은 리더의 마음도 이해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책임을 떠안고 버텨왔고 수많은 의사결정의 결과를 몸으로 감당해왔고 실패했을 때 가장 먼저 이름이 언론에 오르는 사람도 리더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신입 앞에서 “제가 잘 몰라요,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자기 존재 이유를 흔드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제 리더의 존재 이유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정하고, 배움의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의 리더십이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리더십은 “질문을 설계하고, 다양한 답이 올라오게 만드는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요즘 리더에게 더 중요한 역량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걸 말할 수 있는 용기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머리를 숙여 물어볼 수 있는 자존감
비판을 개인 공격이 아니라, 시스템 개선의 신호로 번역하는 능력
입니다.
이 능력이 없는 리더는,
경력이 많을수록, 조직에 “무서운 방음벽”을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바깥의 소리를 더 철저히 가려버리는 존재.
반대로 이 능력이 있는 리더는 경력이 많을수록 조직에 “단단한 안테나”를 설치하는 사람이 됩니다.
혼자서는 못 듣는 주파수를, 주니어를 통해 받아들이게 만드는 존재.
“좋은 말 다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현실적인 몇 가지 방식을 제안해봅니다.
1) 피드백 ‘계약’을 먼저 맺기
리더가 먼저 이렇게 선언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데이터를 근거로 반대 의견을 말해주면 그건 ‘무례’가 아니라 우리 팀을 살리는 행동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심리적 안전장치입니다.
주니어에게 “반대해도 되는 근거”를 공식적으로 부여해줍니다.
2) 회의 때, 일부러 ‘틀릴 수 있는 질문’을 던지기
“내 생각은 A인데 B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들어보고 싶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리더가 먼저 소수 의견을 요청하면 주니어들도 “내가 다른 의견을 말해도 되는 자리구나”라고 학습합니다.
3) 익명 피드백 채널 + 정기 1:1 병행
익명 피드백은 솔직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좋지만 익명만 있으면 책임감 없는 비난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기마다 익명 설문으로 방향성 피드백을 받고 월 1회 1:1 미팅에서 구체적인 사례와 해결책을 같이 논의하는 구조가 좋습니다.
4) “경력에 상관없이, 아이디어는 실험 비용으로만 평가하기”
아이디어가 나오면 말합니다.
“누가 말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보죠.”
이렇게 하면 주니어의 피드백도 ‘위험한 말’이 아니라 ‘작은 실험 제안’이 됩니다.
리더가 해야 할 일은 그 실험의 안전범위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나이 문제가 아닙니다.
20대 팀장도 19살 인턴에게 배울 수 있고 50대 임원도 30대 매니저에게 거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영역에서는 리더이고,
어떤 영역에서는 영원한 주니어입니다.
리더가 주니어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조직은 나이를 세는 집단에서
학습 속도를 세는 집단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런 조직만이 AI, 자동화, 기술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성장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키워가는 조직으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입과 주니어의 비판적 피드백은 조직이 파산하기 전에 받는 “미리 보기 손실”입니다.
우리가 조금 덜 자존심 상하고,
조금 더 빨리 틀렸다고 인정할수록,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브런치를 읽고 있는 리더 한 분 한 분이 “내가 오늘 먼저, 내 주니어에게 비판을 요청하겠다”는 작은 결심을 한다면,
그 조직의 미래 가치는 그 순간 이미 리레이팅(re-rating)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조직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먼저 피드백을 요청하고 있나요?
그 방향이 바뀌는 순간 회사의 궤적도 같이 바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