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단상
『안아 달라는 말』
언제였더라. 틀어막으려 애써도 기어코 터지고 마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네가 말했던 게. 어딘가 있을법한 뻔한 얘기 같아 적당히 흘려들으려 했는데, 그날따라 너는 유독 끈질겼다. 마스카라가 번진 눈으로 애정에 관한 유별난 철학을 늘어놓고서 내 글을 좋아하니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서 반쯤 울고 있었고 진득한 립글로스 너머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강한 사람이니 걱정할 거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네 표정에 놀라 삶이 버거워 미칠 지경이란 얘기가 목구멍 뒤로 숨었던 거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그 시절 나는 네가 좋아한다던 초콜릿이 절반 발린 과자 같았다. 비닐 한 겹만 벗겨내면 죽고 싶은 맘과 살아야 하는 이유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도는 나약한 알맹이가 곧바로 드러났다. 간혹 삶의 의지를 다질 때조차 이유가 불순하기 짝이 없었는데,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마음의 열병을 앓다가 끝끝내 죽어버리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 살아남으리라는 식의 한심한 다짐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마 몰랐겠지.
이따금 그리웠다. 소주 두어 잔과 안주 한 접시에 눈치를 주는 주인의 거친 말투를 더해 마음의 화상을 식히던 밤이, 외투에 고개를 파묻고 꺽꺽대며 웃는 너의 얼굴이, 일렁이는 네온과 술 냄새가 뒤범벅된 아무개들의 분노가, 술병과 쓰레기가 나뒹구는 천박한 도심 공원과 한숨보다 가볍던 다짐들이. 숙취 없는 좋은 기억들이 새벽녘에 찾아와 괴로웠다. 누군가는 술로 빚어진 도시의 밤을 사랑이라 했고, 다른 누군가는 치기 어린 탕진이라 말했다. 뭐가 어찌 됐든 뜨끈한 공기와 매연이 난잡하게 뒤엉킨 서울 하늘 아래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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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