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단상
“봄이 온다네 당신이 온 거처럼”
억겁의 세월 동안 목구멍에 걸렸던 한이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기나긴 탁자 위에 새하얀 보
그 끝에 빈 잔 하나와
삐죽 나온 마른 가지 두개
발화와 함께 툭 떨어진 새빨간 핏덩이가
먼지 둘둘 두르고서 팔딱인다
옳다구나
네놈, 나는 널 안다
덩굴처럼 뒤엉킨 삶과 살에
요절하지 못한 망령이 들러붙은 게지
내 꿈에 찾아와 몇 번이고 목을 조르던
바짝 골은 손 마디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목젖이 빠진 놈은 아무 대꾸도 못 했다.
그리움에 사무친 눈을 하고서
폐에 들어찬 썩은 물을 쏟아내려
연신 기침을 토할 뿐
기필코 이번만은 가엽게 여기지 않을 테다
내 소중한 것들을 데려갈 때마다 넌
불쌍한 척하며 속을 뒤집어 놨으니
쌀 한 줌과 녹슨 대못과 못난 인형 하나 필요했다
다시 만나는 날엔 기필코 죽이고 말리라 다짐했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다 한데
머리통 뒤로 뻥 뚫린 새카만 구멍에 불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미래이자 과거이며 현재인 동시에 다른 차원의 상념이오>
닥쳐
너를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나갈 거 같으니
죽거나 죽이거나 아니면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녀석은 별안간 턱을 덜덜 떨며 웃더니
거미줄을 포크에 둘둘 말아 삼키는 시늉을 했다
피도 침도 마른 파찰음 섞인 기침을 맛깔나게 뱉고
발가락부터 장딴지까지 이내 가슴팍까지 검게 굳었다
억겁의 인내가 무너지는 찰나의 표정으로 동상이 되는 것이다
눈두덩이 묵직해지니
나를 삼키기 전에
너 잠들기 전에
기꺼이 신께 기도하리
<늙은 신과 새로운 신, 하나뿐인 신과 너를 죽인 신, 이내 나를 죽일 모든 이름 모를 잡스러운 이들과 손을 맞잡고 먼지 켜켜이 쌓인 초에 불을 붙이겠다. 을씨년스러운 회랑을 지나 다시 이 식탁을 밝혀야지. 네 가여운 얼굴을 보며 찌그러진 머리통 위에 참새 집이라도 올려야 하겠다. 지키지 못할지언정 그런 다짐이라도 있어야겠다.>
녀석의 표정이 볼만하다
지붕 끝에 장식해두면 참으로 그럴싸하겠다
나도 살기를 택했으니 결국 비슷한 모양새로 죽임당할 운명이다
너를 박제한 우울과 고독처럼 죽음과 함께 살아가야지
새하얀 보
거기에 삼켜져
까만 점이 되는 너는
앞뜰에 봄이 오거든 커튼을 걷어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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