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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Aug 10. 2023

좋은 부모

 좋은 부모의 밑에서 자란다는 행복은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좋은 부모란 아이의 교육과 성장과정에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단순히 부유하거나 아이에게 관심만 많거나 하는 것이 아닌 보다 깊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오직 이 두 가지만 보는 이유는 모든 상황과 환경 차이에 따른 교육 방식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자식에게 돈을 아끼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부자들은 돈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 외에 수많은 가정형 태나 집안 사정마다 교육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좋은 부모의 기준이 편협할 수 있지만 간단히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보다 디테일한 부분은 추후에 다루고 싶다.


 먼저 우리는 당연시 여기는 것이 있다. 부모의 사랑. 이것이 단순히 아이를 가진 이들에 대한 책임이니까 당연히 줘야 하는 것이다-하는 이들이 많은데, 누군가의 책임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을 시에 따라오는 수많은 질타와 문제들이 있을 뿐. 예전에도 말한 적 있듯이 아동폭력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다. 신고된 건 수 외에도 알게 모르게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폭력만 폭력인가? 아니다. 학교폭력이 단순히 몸으로 오가는 직접적인 폭력만이 문제는 아니듯이 정서적인 학대가 더욱 심각하다. 우리가 어릴 때 흔히 당하던 어리니까 무조건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하고 무엇은 안되며 무엇은 이래야 한다 모든 것이 학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아이의 의견을 우선시하며 풀어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tv프로에 나온 장면을 몇몇 보았는데, 볼 때마다 교육의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오은영 박사님은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전문가이고 훨씬 많은 경험이 있으실 테지만 감히 반론을 내보고자 한다(내 말이 옳다, 오은영 박사님이 잘못됐다기보다는 그저 나만의 생각일 뿐). 훈육의 범주에서 무조건 강압적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는 행위는 잘못된 행위임이 맞다. 허나, 아직 온전히 사람으로서 완성되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왜 잘못된 것이고 하면 안 되는 행위인지 설명이 되지 못한다면 본인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다 강한 힘으로 누르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이 '이런 행위가 남을 힘들게, 아프게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단 뜻이다. 매번 모든 사람들이 말하지만 정답은 없다.


 우리는 생각보다 큰 행복을 누리며 산다. 당장 고민할 수 있는 일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행복이다. 내가 지금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도와줄 이나 기댈 곳이 없다면 고민 따위를 하고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도 모자랄 판에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을 따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예전엔 나를 가두는 것으로 느껴지던 부모님의 울타리가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해 온 것보다 많은 책임을 지고 계셨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으며 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끝없이 생각하고 실천해 오셨다. 이런 부모를 두었다는 것 자체 만으로 나는 큰 행복을 얻은 것이다. 사람은 간사하다. 항상 받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원한다. 삶에 대해 타인과의 비교가 더욱 많아진 요즘은 이런 현상이 심해졌다. 이에 따라 수저론이 나오며 서로의 집안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단순히 재산만으로 부모의 역량에 차이를 두면서 안타까운 현실이 만들어진다. 이런 점은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이 중요하지' 정도의 의견으로 보기 어렵다. 이건 사회의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전 문화적인 인식의 문제다.


 날이 갈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세대는 바뀐다. 언젠가 자신이 지금의 부모님 세대가 될 것이다. 그럴 때에 본인은 얼마나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마냥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해서 좋은 부모라고 불려지진 못할 것이다. 성공한 사람과 좋은 사람은 다른 것이다. 그때에 가서 고민할 것은 보다 아이를 위해 해줄 것이 없을까가 아니다. 마라톤을 뛰는 것은 아이고 부모는 그저 중간중간 있는 음료를 나눠주는 휴식터와 잘 달리게 해 주기 위한 좋은 신발을 마련해 주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 정도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 같으면 때려 말려서라도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도리다. 아이가 보다 올바른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있을 때까지는 손을 잡고 함께 뛰어주는 것뿐, 부모의 역할은 단지 그 정도다. 부모는 배려와 참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과도한 참견은 아이가 다리를 멈추게 만든다. 어차피 부모가 끌어주는 곳으로 나아가겠거니-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놓아버린다면 아이는 뒤로 달리게 된다. 길치들은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걷고 보듯이 퇴화하는 줄도 모르고 일단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부모님이다.

나는 행복한 놈이다. 지금 더더욱 고민하고 주저앉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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