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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Nov 15. 2024

나를 좀 더 내려놓고 싶었던 푸꾸옥

푸꾸옥 3박 5일 에세이

가슴이 턱 하고 막힌 기분이 들 때면 트인 곳을 찾게 된다. 이번에 찾은 곳은 푸꾸옥이다. 푸꾸옥에 짐을 맡기고 별다른 일정 없이 가까운 카페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코코넛 커피를 주문했고 바 테이블에 앉아 푸꾸옥 시내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나긋나긋 대화 나누는 소리, 경적 소리, 살며시 눈빛을 보내며 그랩?이라고 말하는 기사님 목소리까지. 동남아에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 있다는 걸 천천히 실감하게 된달까. 평균 30도로 습도는 높고 뜨거웠지만, 짜증이 나기보다 '덥네. 여름이구나' 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보내는 여유까지. 급한 성격 탓에 놓친 것들을 오롯이 만끽하게 된다.


사람마다 여행스타일이 다르다. 나는 적당한 일정과 적당한 여유를 좋아한다. 3박 5일 푸꾸옥을 여행하는 하루하루마다 적당한 일정이 있었다. 시내투어, 물놀이, 사파리와 놀이공원, 해변투어. 첫 번째 일정은 야시장과 단카우사원이다. 이제는 사원을 좋아하는 이유가 좀 선명해진 것 같다. 사원은 주로 자연 속에 있다. 적당한 자연냄새와 향냄새가 섞여 있고 한 발짝 한 발짝 조심히 걸으며 합장한 손 위로 고개 숙여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속에 있다 보면 무교인 나도 조용히 내 건강을 빌게 된다. 살피지 않은 내 마음에 집중하고 어떻게 하면 내 하루가 천천히 지나갈지 들여다보게 된달까.


둘째 날 혼똔섬 케이블카에 탔다. 혼똔섬 케이블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로 약 20분 동안 이동한다. 내 옆에 한 가족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바다와 바다 옆에 모여있는 집들을 보면서 말했다. "나는 늘 누군가를 위해 배려하면서 살았어. 심지어 난 이번에 비행기 탈 때 아기들이 많아서 자리를 양보해 줄 생각이었거든.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다른 사람도 중요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바다와 이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순간을 즐기는 말이었다. 어머니 말속에서 내가 여행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말이다.


이 말을 듣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여행하면서 엄마에게 제일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으니까. 엄마에게 갱년기가 찾아오면서 엄마는 늘 집에만 있었다. "다 늙어서, 이제 와서, 됐어 그냥 집에 있을래."와 같은 말만 달고 살았다. 여행 가자고 해도 귀찮다며 다음으로 미루는 엄마를 5년간 설득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좋은 걸 경험할 때마다 엄마랑 여행하면 어떨지 상상만 하고 있다. 가족 여행 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딘가 씁쓸했다. 나도 엄마랑 추억을 가지고 싶을 뿐인데,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좀 더 아끼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인데. 설득에 실패하면서 엄마를 설득할 에너지까지 잃어갔다. 근데 옆에 계신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다시 한번 엄마에게 여행하는 마음을 알려주고 싶어졌다.


우연히 듣는 말에서, 아 나도 저런 감정이었지 하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애써 되새김질을 하지 않아 놓칠 뻔했던 감정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나를 먼저 생각하며 삶을 살고 싶다. 지금 아니면 후회할 것들이 두서없이 생각나지만, 지금은 늦은 것 같아, 지금은 돈 벌 시기야. 하면서 매번 샘솟는 마음을 꺾으려 했다. 근데 이 마음이 몇 년째 지속된다면 진짜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최근 스트레스로 역류성 식도염이 또 찾아왔다. 분명 스트레스받지 않고 무난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지 몸은 계속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 참는 게 버릇된 나이인지라, 내가 힘들다는 것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번 마른기침 때문에 폐가 아프곤 했었는데 푸꾸옥에선 마른기침을 하지 않았다. 기침을 하지 않는 게 어색해서 의식적으로 하게 된달까. 그만큼 스트레스가 줄어든 걸까. 가끔은 현실에서 벗어나 온전한 내 감정과 마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물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신나게 물과 놀았다. 수영을 배우고 싶어서 매달 새벽 6시에 힘들다는 수강신청을 했지만 실패했다. 수영을 할 줄 알았다면 물에서 더 잘 놀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냥 물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놀이기구를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렇게 잘 놀다가 친구랑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졌다. 이번에도 확실히 느꼈지만, 난 말에 영향이 큰 것 같다.


함께 여행하면 배려해야 할 때가 많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을 필요도 있다. 또한, 힘들지만, 같이 해야 할 일도 많다. 친구는 대부분 내게 의지했다. 그래서 뭐 하나라도 삐끗하면 인상을 잔뜩 쓰며 짜증을 냈다. 난 그 짜증이 납득되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내가 잘못한 듯 기가 죽어 있는 사실도 이해되지 않았다. 함께 하는 여행인데, 내가 그 친구의 여행을 돕는 기분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대화로 나누면 되는데, 친구는 인상부터 쓰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여행을 망치길 바라는 사람도 아니고, 여행하면 예기치 못한 상황도 많을 텐데, 그 감정을 온전히 전해받는 게 지치기 시작했다. 내 감정을 나누지 않아서인지, 화낸 게 미안해서인지 친구는 "그다음엔 어디가? 그다음엔 뭐 해? 얼마 남았어?" 하나하나 물었다.


대화로 풀고 싶었지만, 상대방 쪽에서 원치 않는 것 같아서 딱히 풀진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기분 안 좋은 내 감정을 말할 에너지도 없었다. 친구는 여행 중이라 오히려 말을 아끼는 듯했지만, 이미 안 좋은 기분을 털어낸 뒤에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친구가 더 미웠다. 감정이 쌓이기만 했다. 내가 이 친구의 가이드로 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쯤, 하루하루가 천천히 흐르길 바랐던 마음이 없어졌다. 이틀만 버티면 돼, 하루만 버티면 돼. 이게 여행이 맞는지 싶었고 내 여행이 안쓰러웠다.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싶고, 저녁에 바에서 맥주도 마시고 싶은데, 귀찮다는 친구의 말에 나도 그냥 호텔에만 있었다. 혼자라도 나갈 걸 그랬다. 기분전환하러 간 여행인데. 그러다 마지막 날 조식 먹고 12시까지 객실에만 있겠다는 친구의 말에 처음으로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바다에 갔다. 파라솔 아래에 앉아 수영하는 사람들을 봤다. 백발을 한 할머니가 혼자 바다에서 수영하며 놀고 있었다. 과감하게 물속으로 들어간 할머니와 달리 혼자 여행 온 중년 여성은 바다 끝에 앉기만 했다. 그때 할머니가 다가와 중년 여성이 무서움 없이 물놀이를 할 수 있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글을 쓰고 싶었다. 혼자 여행 온 마음은 무엇일지, 만약 둘이 아는 사이라면 어떤 마음일지, 서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었달까. 영감, 영감을 얻었다.


영감을 얻고 카페를 찾아다녔다. 구글에는 영업 중이라고 쓰여있었지만, 막상 다니 문이 모두 닫혀있었다. 결국 호텔로 돌아가려고 할 때 거리에서 큰 음악소리가 들렸다. 거긴 커피를 팔고 있었다. 현금이 없어서 카드가 되는지 물었다. 카드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 돌아서는 나를 사장님이 붙잡았다. “커피는 내가 살게. 넌 즐기기만 해!" 사장님은 음악을 따라 부르거나 지나가는 사람의 안부를 묻거나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신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카페에는 레게풍 노래로 평소에 내가 듣지 않은 음악 스타일이었다. 근데 요즘 이 음악에 빠져 있다. 이 순간의 기억이 좋아서 어느새 좋아졌나 보다. 사장님과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었고 나도 그 에너지와 함께 물들고 싶었다. 나를 좀 더 내려놓고 싶었다. 맨날 감추고 피하던 내가 아닌 진짜의 나로.


그래서 먼저 다가가 한국어 메뉴판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면서 썼지만,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래서 밑에 "푸꾸옥에 여행온 여행객이에요. 해석은 엉망일지 모르지만, 커피와 음식은 맛있어요."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사장님께 이 말 뜻을 전했고, 정말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해 주셨다.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였다. 남자 사장님은 우리 섹시한 와이프라고 내게 소개해줬고 여자 사장님은 섹시? 하면서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말 뜻을 100% 이해한 건 아니지만, 100% 행복이 전달됐다. 음식을 대접해 주고 싶다고 하셨지만, 아쉽게도 오늘 떠나야 해서 다음에 놀러 오기로 약속했다.


여기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구글 번역으로 한국어 메뉴판을 만들었는데, 괜찮은지 내게 물었다. 나는 다 괜찮은데 '자신의 주스를 섞다'이게 조금 어색하긴 하다고 말했다. 이해되냐는 말에 그렇긴 하다고 했고 사장님은 그럼 문제없다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이런 자유로움, 내가 너무 찾던 모습이다.


푸꾸옥은 뭐랄까. 엄마 같다. 에어컨이 켜진 매장이 생각보다 없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 하는 듯하달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넋 놓게 됐다. 한 곳을 응시하다 보면 불현듯 뜬금없는 기억들이 하나둘 생각난다. 처음에는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괴로운 감정이 아니라 난 왜 그 감정을 느꼈는지 되새기며 내 감정에 집중하게 된달까. 그러다 잠깐 그 기억에서 벗어날 일들이 생겼다. 푸꾸옥의 친절한 직원들 덕분에 말이다. 짧게 머물렀지만, 같은 카페와 마사지샵을 가면서 단골집을 만들었다.


마지막 날에도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의 강도가 세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악'소리를 냈고 마사지사는 웃으며 강도를 조절해 줬다. "네가 날 선택했지? 그렇다면 오늘 너의 승모근은 없어지는 거야. “라는 비장한 표정과 함께 뭉친 내 근육통을 풀어줬다. 그럴 때마다 '악'소리와 함께 웃음이 나왔고 직원과 나는 같이 웃었다. 참 별거 아닌 거에도 웃음이 나온다.


카페 역시 두 번째로 방문했다. 에어컨 있는 자리가 없어서 그늘진 야외석에 앉았다. 한 직원은 우리가 두 번째 방문이라는 걸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해 주며 선풍기 방향도 우리 쪽으로 돌려줬다. 작은 선의일지 몰라도 이런 게 좋은 추억과 좋은 기분으로 이어지게 한다. 나도 감사를 나눌 여유까지 생기면서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쉬운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편안한 것도 있다. 그만큼 여행 경험치가 쌓인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내 기분에 따라 움직여도 된다는 걸 알 정도로 성장한 걸까. 지금 느끼는 감정을 일기로 남길 수 있는 것마저 좋다. 하루 더 정비하고 싶어서 다음 날 연차를 냈다. 여행의 후유증을 조금 덜어낸 뒤에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불안정하지만 괜찮은 내 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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