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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쁠 희 Jul 08. 2021

06 지금 도망가도 아무도 모를거야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탈출하고싶어 졌다.

오피스에 내 자리가 생겼다. 엄청나게 큰 모니터에 좋은 노트북까지, 무엇보다 뒤편에 아무도 없어서, 감시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또한 꽤나 크게 작용했다. 쓰고 싶은 필기구들도 회사 돈으로 편하게 주문할 수 있었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장님 덕분에 다양한 커피 머신이 구비되어있는 회사 키친도 좋았다.

Photo by Tranmautritam from Pexels - 비슷한 셋업이었다.


하지만 업무에 돌입하는 순간, 이 모든 특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게 되었다.

회사는 매일 아침 9시에 모든 팀원들이 다 같이 서서 해야 하는 일과 했던 일들에 대한 보고를 나눈다. 이것을 scrum(스크럼)이라 불렀는데, 처음 참가한 이 미팅 때부터 나는 내가 과연 괜찮은 선택을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입사한 회사는 보험사들과 보험관리사들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곳이었지만, 나는 보험도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도 아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인원의 80%가 개발자들이었던 만큼 대화의 대부분에 기술적인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때 당시 캐나다 거주 10년 차였던 내가 이토록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나 자괴감에 시달릴 정도로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문맥상 어떤 이야기겠다고 예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문장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연속이었다.


그 이후의 생활도 비슷했다. 규모가 작은 회사인 만큼 각자가 대기업에서는 한 팀이 운영해야 할 수준의 업무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바빴고, 내가 어떻게 끼어들어서,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Onboarding(온보딩 - 입사 초반 수습 기간) 프로세스도 제대로 적립되어있지 않아서, 하루의 1시간에서 최대 2시간 정도, PM(프로젝트 관리자)분이나 CS(고객관리)를 담당하시는 분 옆에서 하는 일을 보면서 쉐도우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극 대부분의 시간을 보험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멍을 때리는 것에 썼다. 이 회사에 나란 존재가 너무 쓸모없이 느껴졌다.


대부분은 경력이 7년 이상 쌓인 데다가, 몇몇 분들은 자녀분들이 나와 동년배였기에 캐주얼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어색한 점심시간이 두려워 항상 남들이 다 먹고 난 후에 도시락을 꺼내서 키친으로 향하기도 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짐을 싸고 나간 뒤 잠수를 타도 아무도 신경 쓸 것 같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고민했고, 이건 장장 4개월 동안이나 이어졌다.

'지금인가?' '지금 나가볼까?' 



그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쓸 일이 있으니 고용했겠지, 내가 쓰임 받을 날이 오겠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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