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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Mar 11. 2024

내가 해냄

큰개랑 삽니다

 내가 가장 해낸 것을 소개하겠다.




  가끔 출판산업 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서점에 간다. 읽고 싶었던 책이나 읽어야 할 것 같은 책 말고, 코딱지만 한 인세와 쌓이는 재고 때문에 글쓰기가 싫어지지 않아야 하는 저자들의 책을 두어 권 산다. '충주에 사는 삼십 대가 한 권 사드렸으니 용기 잃지 마쇼!' 그런 지지를 보내는 행위다.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서점에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연휴 첫날이라 그런지 참고서를 사는 사람, 인문학을 사는 사람, 소설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 책을 계산하기 위해 오랜만에 줄을 섰고, 이 서점이 안 망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흥얼흥얼 내 차례를 기다리다 문득 계산대 위에 올려진 여러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유치한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를 위해 마련된 진열대 같았다.


 그날은 유독 귀여운 도장들에 눈이 쏠렸고, 곰돌이가 양 주먹을 꼭 쥐고 '내가 해냄'이라고 외치는 도장을 들어 올렸다. 다이어리에 찍으면 귀여울 것 같았다. 글이라도 쓴 날에 '내가 해냄'을 쾅 찍으면 얼마나 칭찬받는 기분이 들겠는가. 그러다 '유치해도 정도껏.'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려놓았다. 학교에서 애들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주는 거랑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내 계산 차례가 왔고 책을 계산했다. 계산원이 책을 봉투에 담는 순간 "죄송한데 이것도." 도장을 추가했다.


 귀엽고 유치한 곰돌이 도장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길, 벌써부터 해낸 기분이 들었다. '너무 많이 해내면 어쩌지?' 걱정했다. 도장은 다이어리 옆에 자리 잡았고, 해낸 일이 있는 날 밤 곰돌이 도장을 팡팡 찍었다. 도장은 찍을수록 더 찍고 싶어졌기에 해내는 순간을 기억하겠노라 마음 먹었다.


 내가 가장 해낸 것을 소개하겠다.


 어쩌다 보니 팔자에도 없는 연구부장을 맡았다. 연구부장이라 함은 학교에서 교육과정 짜고 교사들 장학 활동 지원하고 뭐 그런 일을 하는 부장인데, 내가 기억하는 연구부장님들은 대게 건조기에 오래 돌려진 수건처럼 퍼석했다.


 사람들이 '교사가 뭐가 힘드냐, 방학 있는 직업이 세상에 어딨냐.'고 교사의 설움을 한방에 퉁칠 때도(우리 아빠가 대표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 "네, 방학이 있습죠." 했던 나였다.


 그러나 연구부장을 맡은 뒤로 습관성 불안이 찾아와 2월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눈이 침침하고 근시와 원시와 난시가 한방에 올 것 같았다. 그렇게 방학을 불태워 놓고도 야심 차게 준비한 문서들은 오타와 오류로 점철되어 있었고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이 나의 홈타운이라고 생각했다.


 3월 첫 주, 큰개를 책임질 사람이 오롯이 나 혼자가 되었다. 혼자 있는 설움도 싫었고(본인은 주말에 대전, 학기 중엔 충주에 있다), 신랑도 바빠서 겸사겸사였다. 발목이 손목만 한 내가 연구부장과 큰개의 산책을 둘 다 해낼 수 있을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신랑이었고, 그 다음이 나였다. 앞날이 심히 걱정되었으나 혼자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커서 꾸역꾸역 큰개를 데리고 충주에 왔다.


 충주에 와서도 여전히 컴퓨터 앞이다. 거북목과 라운드 숄더를 한 채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뻗어 있는 큰개를 내려다본다. 큰개는 주인에게 붙들려 한 시간을 뛰고 와 눈을 뒤집어 깐 채, 배도 활짝 열어놓고 드릉드릉 코를 곤다. 입맛도 쩝쩝 다시고, 꿈을 꾸는 지 뛰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일 때도 있다.


 산책으로 조져진 큰개를 보고 있자면, 마음속에 '내가 해냄' 도장이 쾅 박힌다.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 뭐라도 되는 냥 시간을 가득 채워 내 영혼은 퍼석하게 말라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 큰개를 흡족히 산책시킨 나를 크게 칭찬한다. 큰개 산책 어워드가 있다면 최우수상 정도는 받을 것이고 수상소감은 이렇게 하겠다.


'너라도 행복하면 됐어.'


 사람들은 내가 뭘 해냈는지 모를 것이다. 나의 동료들은 이제 제발 해낼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묻고 싶을 수도 있다. 나도 내가 뭘 해냈는지 명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내가 해냄' 도장을 쾅 찍는다. 큰개가 내 옆에서 혀를 죽 내밀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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