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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각글

뜻 밖

by 김Genie

첫 책이 나왔다. 나는 줄곧 내가 에세이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그렇게 말하기엔 게으르다는 것도 동시에 생각한다), "에세이 책 내보는 게 소원이에요."라고 자꾸만 말해왔기에 내 첫 책은 에세이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첫 책은 교육 관련 서적이 되었다. 책 제목은, 거창하기도 하여라 '수업혁신사례연구대회 전국 1등급의 비밀'이다.


줄곧 꿈꿔온 저자 북토크도 했는데, 인생에 대한 소회나 감상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1등급 받을 수 있습니다."식의 다분히 직접적이고 정보 전달적이며 도구적인 내용이었다. 별 감흥은 없었고, 그저 책이 몇 권 더 팔리려나만 생각했다. 에세이 저자가 되어 독자들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부여잡고 건네게 될 줄 알았던 첫인사의 기회를 이렇게 소모해도 되나 싶었다.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수업혁신사례연구대회에 참여하는 교사가 작년에만 어림잡아 1,700명 정도 된다. 대회에 관심이 있으나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한 교사까지 헤아리면 적어도 2,000명은 넘을 것이고, 올해에는 대회 규모가 더 커질 것이니 책이 출판되면 1,000부는 거뜬히 팔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책은 출간되었고, 놀랍게도 아무 일이 없었으며 판매 부수는 화들짝 놀랄 만큼 적었다. 나는 금세 출판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 내용 진짜 좋은데... 진짜인데... 진짜 도움 많이 되는데..."라고 혼자서는 몇 번 중얼거렸다.


책을 좀 더 팔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다 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1,000명이 책을 사게 해야 하는데,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지인 중 이 책을 살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5명도 채 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파는 입장이 된다는 건 허리가 저절로 굽어지는 일이라는 걸 저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책을 사서 읽었다고 인증해주는 지인들에게 "감사합니다, 고객님."이라고 답장을 하면서 진짜로 허리가 굽었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팔지 않아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뜻밖의 감사함을 느꼈다.


뜻밖의 일은 또 있었다. 지난겨울 수업혁신사례연구대회 전국 1등급 교사 100명에게 영국으로 해외 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졌었다. 곧장 재승씨(아버지)에게 자랑했다. 재승씨에게 교사인 딸은 너무 자랑거리라서 식당에서도 서빙해주시는 분께 "얘, 무슨 일 할 것 같아요?"라고 한 번은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교사가 되고 나서 그 이후로 이룬 게 없었기에 재승 씨는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로 딸 자랑을 했다. 레퍼토리 좀 업그레이드하라고 "나 수업 잘해서 상 받고 영국 가. 전국 100등 안에 들었어."라고 말해두었다. 며칠 뒤 재승씨 집에 놀러 갔더니 친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딸 집에 왔네. 이번에 영국에 연수를 간다네. 무슨 상을 받았다나 뭐라나. 내년엔 미국도 간대."


재승씨에게 자랑하는 건 좋은데 거짓말은 왜 하냐고 물었다. 재승 씨는 뭐 어떠냐고 대답했다. 재승씨가 왜곡된 부성애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름, 나는 뜻밖에도 미국령 하와이로 연수를 간다. 영어 지도 교사 심화 연수인데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었다. 작년엔 호주였는데 갑자기 미국으로 바뀌었다. 황당하게도 재승 씨의 왜곡된 부성애가 현실이 된 것이다. '재승씨에게 신이 들린 걸까.' 잠시 의심했다. 그러나 재승씨에게 신이 들렸다면 우리 집 경제 상황이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의심을 접었다. 어쨌건 이 뜻밖의 상황을 재승 씨에게 전해야 했다.


"아빠, 겨울에 딸 미국 연수 간다고 친구한테 거짓말 쳤지. 근데 나 진짜 미국 가."


승회(남동생)는 "나라 세금으로 잘 돌아다니네."라고 하다가 한 대 맞았고, 재승씨는 "아이고, 우리 딸 잘 나가네."라고 하며 기뻐했다. 뜻밖에도 나랏돈으로 효도를 하게 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재승씨는 또 친구에게 전화를 했을 거다. 딸이 미국 다음으로 또 어디를 간다고 왜곡된 부성애를 뽐냈을 것이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진부한 말이 새삼 실감난다. 에세이 작가를 꿈꿨지만 교육서의 저자가 되었고, 재승씨의 '허언'이 현실이 되는 기적(?)까지 목격했다. 뜻밖의 일들은 때론 감동으로, 때론 허탈함으로 다가오지만, 결국 이 모든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이 모여 삶을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하거나, 기가 막히게 어이없는 것으로 만드나 싶다.


영어 연수를 가게 되면 엄청나게 영어 공부를 많이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 밖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를 읽어주시던 분들, 거기 계시나요!!! 다들 탈퇴하거나 브런치 앱을 지우거나 하신 건 아니겠죠!!!! 늦게 등장하여 황송합니다. 다들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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