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아니라 오늘 행복하고 싶어
행복을 유예하는 피로사회 벗어나기
저 진짜 취업 거부생 맞다니까요?
지난 달부터 사무 알바를 시작했다. 취거생(취업 거부생)으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으면서 자꾸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아무튼 그렇다. 망할 놈의 한국인 피가 나를 도무지 쉬도록 내버려 둘 줄 몰랐다. 대학교 막학기를 남기고 있었고, 졸업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3월까지는 안식월인 셈 치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불안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마음에 떠밀리듯 학과 단톡방에 올라온 단기 사무 알바를 지원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시작이었다.
지원한 단기 사무직은 최저 시급이었다. 계약 조건은 터무니 없었다. 통신사 노예 계약보다도 더 한 노예 계약이었다. 회사는 철저히 갑이고 나는 철저히 을이었다. 회사가 나를 자를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고, 내가 회사를 때려치울 이유는 계약서 지면 어디에도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자를 자유는 있지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 둘 자유 따윈 없었다.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대신 포기할 경우 40만원 상당의 비용을 물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퇴사할 경우 "손해 배상 청구", "법적 대응"이라는 언어로 겁박했다. 누가 봐도 파견 인원 세 명이서 해결하기엔 택도 없는 업무량이었다. 이게 뭐하자는 건가. 아무리 봐도 힘 없고 경험 없고 가진 거 없는 대학생들 이력서에 한 줄 더 적게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노동착취였다.
한 달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명백하게 착취당한다고 느꼈다. 하필 파견 업체도 집에서 먼 곳으로 배정받는 바람에 수면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해졌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와 저녁 8시에 집에 돌아왔다. 하루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나에게 자유는 없었다. 지각할까 봐 깊이 잠드는 것도 어려웠고, 미친듯한 업무량에 식사 시간조차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다. 비급여로 빠지는 한 시간 휴게시간은 말이 좋아 휴게 시간이지, 원하는 곳까지 산책을 나가기도 어려웠고, 낮잠을 청하기도 애매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 시간은 비급여로 빼자고 했는지 면상 한 번 보고싶었다.
출퇴근하는 서너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라 길에 버리는 시간이었다. 시간과 함께 성질도 버린 사람들 틈에 부대껴 매일 전쟁처럼 집과 회사를 오갔다. 주변엔 마땅한 식당도 없었고,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나는 식비도 아끼고 고민도 덜어낼 겸 도시락을 싸갔는데, 늘 가져간 도시락으로 하루를 버티느라 몸도 마음도 허기졌다.
배고플 때 먹을 수도 없었고, 눕고 싶을 때 누울 수도 없었다. 종일 컴퓨터를 들여다 보느라 눈이 아팠고 머리에선 열이 났다. 엉덩이가 아픈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종일 앉아있어야 하는 탓에 중둔근 운동이 마려웠다. 그러나 운동 할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한 마디로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것을 할 선택권이 없었다. 하루 종일 자율성을 박탈당했다.
그러는 동안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누워서 낮잠을 자야만 나을텐데, 싶은 고통이 며칠 지속되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귓바퀴가 누르지 않아도 아파왔다. 귀의 혈자리를 잡아당겨도 아프지 않았던 나인데. 출근 3주만의 일이었다. 업무량이 정점에 도달함과 동시에 소화력은 바닥을 쳤다. 먹은 것을 단 하나도 흡수하지 못했다. 시간 당 9860원이 한 시간 단위로 나를 좀먹었다. 고통받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파견사의 노예 계약서가 우리를 좀먹었다. 파견 나온 팀원들 사이 이슈는 병원비 청구였다.
분노와 피로가 중첩되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업체로 파견 나간 사람들은 홧김에 지원받은 식대로 점심 밥을 두 번씩 사먹었단다. 그런 식으로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던 거다. 과잉생산(과잉노동)이 연쇄적으로 과잉 소비를 낳는 현장을 목도했다.
화풀이로 점철된 노예 생활
대부분의 삶이 그렇다. 일상은 도피하고 싶은 것이고, 월요일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다. 출근은 괴롭고 퇴근만 손 꼽아 기다린다. 달력의 연휴를 세고, 근속연수를 채우면 받는 휴가만을 염원하며 항공권 사이트를 뒤진다. 오늘 저녁이라도 맛있는 걸 사먹어야 분이 풀릴 것 같고, 내가 이렇게 일 해서 이 정도도 못 가지나 하는 마음에 장바구니를 채운다.
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늘은 어제와 똑같고 행복은 내일로 미룬다. 직장인이 원하는 건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다. 이따가 퇴근하면, 나중에 휴가 받으면, 공휴일 연휴가 오면, 연차를 내면.
당장 행복해지고 싶어서 구입 버튼을 누르지만 그 행복도 잠깐이다. 내일도 개같은 일상이 나를 좀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다시 비참해진다. 아무리 상여를 많이 받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내 현실은 가기 싫은 곳에 가서 버텨야만 하는 하루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행복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었다. 아무리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만 남긴 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마케팅과 자본주의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아무리해도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할 시간도 선택권도 자유도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아무리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가지고 많이 여행한들 일상이 지옥인데 무슨 소용일까. 우리는 벌고 사고 쓰고 버리고 떠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순 없는걸까.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노동 착취당하고 있는 것 같아.
아빠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왜 착취라고 생각하냐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정 반대로 궁금했다. 왜 착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24/7 온 종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데 그럼 이게 자유로운 삶인가.
아빠는 노동을 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는 교환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말했다. 착취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가짐이 문제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정말 정당할까. 내가 언제든 그만 두고 싶을 때 그만 둘 수 있고, 회사와 내가 동등한 권리를 나눠 가졌을 때나 정당한 게 아닐까. 이렇게 아프고 배고프고 힘들고 어지러운데 억지로 출근하면서 최저 시급 받는 노동이 과연 정당한가. 벌어도 부족한 느낌을 받는다면 정당한가. 내가 얻는 효용보다 잃는 것이 많은데도 교환이라고 할 수 있냐는 말이다.
기업은 사람을 쓰고 버린다. 평생을 하고 싶은 일 포기하며 근무했어도 돈이 안 벌리면 한 순간에 나가리다. 평생토록 직장 생활 하면서 이 업무만 해왔는데. 다른 것은 할 줄 모르는 사람, 정해진 직무대로 움직여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쓰다 버린 이후의 삶은 책임져주지 않는다. 일한 동안에도, 일을 하고난 뒤에도 직장에 의해 삶이 조종당하는데도 착취가 아니라니. 노동 윤리가 다 뭐길래 이렇게 현대인을 망쳐놨나 싶다. 노예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길은 자유롭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따지고 싶었다. 그러는 아빠도 출근 하는 게 기분 좋냐고. 회사에 나가는 게 즐겁냐고. 돈을 벌어야해서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 집은 아빠의 삶을 희생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은 국가와 기업이 경제성장을 빌미로 아빠의 노동력을 쓴 대가였다.
습관과 바름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잖아, 그러니까 견뎌야지. 그런 건 그나마 기득권에 속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이 체제를 만든 기성세대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석박사도 아니고, 엘리트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니다. 우리 집안과 나를 떼어놓고 봤을 때 나는 기득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요소가 거의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사회초년생이고, 경험도 없고, 여성이고, 아시아인이며, 아직 어리고(체감상)... 그냥 한 마디로 가진 게 없다. 나는 사장이 아니다. 최저임금 받으면서 대가리 뽀개져라 노동하는 한 낱 노동자다. 강자 동일시는 자기 무덤 파기다. 해왔던 일이라고 해서 그러려니 넘기고 받아들여라?용납할 수 없었다. 내 허락 받고 이런 세상 만든 것도 아니잖아. 좋아서 이렇게 살겠다고 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명백한 약자인 내가 명백한 약자로 머물 수밖에 없는 체제를 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외치고 싶은 지경인데 세상이 바뀌질 않는다. 이미 걸어왔던 길이므로 너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니.
그런 논리대로라면 봉건제도 옳고 식민통치도 옳다. 신분제도도 옳고 차별도 옳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 옳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심지어 지금 식민 지배가 없는 것도 아니며(여전히 강대국의 경제는 식민지의 땅과 노동력을 빌어 이루어지고 있다) 신분제도는 자본력으로 교묘하게 교체되었고, 차별 역시 여전히 만연하다.
아빠가 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돈을 벌었으니 나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이건 억지다. 원하는 일을 생계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없어져야 맞는 거다. 먹고 살기 위해 먹고 사는 일을 희생하는 사람이 없어져야 맞는 거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먹는 것은 돈으로 대충 사서 때우고, 사는 것은 노동하며 숨만 붙어있는 상태로 치환해버리는 상황을 더이상 두고 봐선 안 된다. 억압당한 자유는 언젠가 폭주한다. 지금은 혁명 대신 자살율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화풀이로 소비하는 일은 지구도 자신도 고갈시킨다. 그런 삶은 지속될 수 없다.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
덜 노동하고 덜 소비하기
많이 벌고 많이 써도 내 삶이 없다면 공허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일, 현실적인 일에 뿌리내리고 산다면 삶은 단단해진다. 내가 먹을 것을 직접 생산하고 내가 있을 곳을 직접 짓고, 내가 사용할 것을 직접 만드는 일이다. 경제학자는 이를 원시적인 것이라며 코웃음쳤다. 파를 재배하느니 돈을 벌어 파를 사먹으라고 하는 게 경제학자다. 하지만 이게 개소리라는 건 파테크가 말해준다. 자급 수단의 확보는 외부 경제 상황에 흔들리지 않을 회복력을 갖게 해준다.
과연 내가 지금 하는 노동이 오늘의 나를 부양하는 것, 오늘 내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것과 직결된다면 노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질까. 아마도 살아있다는 실감을 통해 삶이 충만해질 것이다.
덜 벌고 덜 소비하고 덜 노동하고.
더 자급하고 더 나누고 더 교환하면 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절제하는 삶을 어떻게 사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절제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누리는 삶이다. 쓰기 위해 벌고, 벌기 위해 노동하고, 다시 노동하기 위해 쓰는 삶이야 말로 자기 욕구를 억누르고, 참고, 절제해야 하는 삶이 아닐까. 피곤해도 일하는 대신 피곤할 때 낮잠잘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절제와 금욕의 삶인가.
탈성장은 불편, 절제, 금욕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절제와 금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