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처음은 기억에 남는다. 그 노인은 젊은 변호사의 첫 번째 의뢰인이었다.
한 노인이 젊은 변호사를 찾아왔다. 젊은 변호사가 새 직장으로 발령받고 짐도 풀기 전이었다. 변호사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왔다고 했다.
노인은 사무실 구석에 있는 의자를 골라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았다. 젊은 변호사가 녹차 한잔을 내오니 연신 고맙다고 인사한다. 노인은 불편한 자세로 앉아 한참을 얘기했다.
젊은 변호사는 불쑥 찾아온 노인이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노인이 할 말을 다 할 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는다. 시간이 흐르고 말을 마친 노인은 이제 되었다는 듯 후련하게 자리를 뜬다.
젊은 변호사는 캐비닛을 뒤져 노인의 사건 기록을 찾는다. 기록을 읽으며 노인이 한 말을 떠올린다. 이내 기록을 두고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간다.
노인은 15년 간 A기업에서 프레스 금형으로 냄비를 만들던 노동자였다. 최저임금 보다 낮은 급여를 받으며 일했다. 15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퇴직을 할 때는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노인이 퇴직할 때 퇴직위로금을 받고 해고를 다투지 않겠다고 서명한 것이 문제였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1심 판사가 자초지종을 듣지도 않고 서명을 했는지만 물었다고 했다. 노인이 서명을 했다고 하니 소송을 각하를 했다고 한다. 노인은 판사가 자신의 얘기조차 듣지 않았다고 억울해했다.
젊은 변호사는 노인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한다. 노인은 흔쾌히 찾아온다고 했다.
노인은 십여 년 간 꼬깃꼬깃 모은 조그만 종이 임금 수령증을 한 뭉치 들고 찾아왔다. 그 종이에서는 담배냄새가 났다. 노인은 그 임금 수령증을 모아 온 것을 뿌듯해했다. 언젠가 분쟁이 생길 것을 예상하고 모은 것인지 그동안 성실히 일해온 기억을 모아 온 것인지 모르겠다.
그 종이뭉치는 노인에겐 삶의 기록이지만 젊은 변호사에게는 갑제 0 호증으로 보인 듯했다. 노인이 소중하게 모아 온 수십 장의 임금수령증을 빠른 손길로 넘기며 노인의 말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젊은 변호사가 노인이 들고 온 서류들을 살핀다. 그동안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A기업에서 일했던 것, 사업을 했던 것들을 말한다. 노인에게서 생기가 돈다. 젊은 변호사는 이따금 추임새를 넣거나 작은 미소만 짓는다. 그러다 한 번씩 질문하고 메모를 한다.
노인은 최저임금을 못 받은 것도, 퇴직금이 적은 것도 괜찮다고 한다. 다만 법정에서 판사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면 좋겠고, 사장 가족이 자신을 속인 것이 참을 수 없다고 한다.
노인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주섬주섬 서류를 챙긴다. 젊은 변호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말해준다. 노인은 연신 변호사님만 믿는다고 한다. 그리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어서 속이 후련하다고 눈물 맺힌 눈을 닦는다. 젊은 변호사는 동요하지 않는다.
노인은 사무실을 떠나기 전에 십 년 전 연락이 끊긴 아들들과 연락이 닿았다고 말한다. 이번 추석에 아들들이 차례를 지내러 온다고 설레한다. 변호사님을 만나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감사하다고 한다.
젊은 변호사는 노인에게 감사할 일을 한 적이 있나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지 고개를 젓는다. 젊은 변호사의 손은 노인이 두고 간 담배 냄새가 밴 임금 수령증을 꽉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