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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녹으면

아들의 아스퍼거 진단 - 5

by 앨리의 정원

우리 아이는 4세부터 5세까지

오은영 아카데미에서 일주일에 감각통합 2회씩, 언어/놀이/사회성 치료를 1회씩 받았다.

진단 후 초기 3개월 정도 ㅇㅇ소아정신과에서도 언어/놀이/사회성 치료를 1회씩, 부모상담12회를 병행했다.


두 곳에서 치료를 병행하니 한 달 치료비가 350만 원 정도 들었다.

처음에는 아들을 살리겠다는 생각 때문에 치료비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아이의 진단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치료비의 의미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3개월째 들어서니 침착해지는 순간들이 생기면서

400만 원에 가까운 치료비가 현실로 다가왔다.

애가 자라면서 다른 비용들이 더 들 텐데

평생 400만 원에 가까운 치료비를 매달 감당해야 하는 삶에 공포를 느꼈다.


차도가 없는 아들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너진 채

누가 건들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눈으로

하루하루 집과 센터를 오가다가

어느 날 지하철 창 밖으로 얼어있는 한강이 보였다.

강이 얼 정도로 추워진 날씨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며 치료비 청구서를 떠올리다가

남편이라도 살게 해 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한강이 녹으면.

얼어 있는 한강에 빠지기엔 우리 아들이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봄이 되면.

우리 아이와 함께 한강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나는 우리 아이가 모진 세상을 겪기 전에 차라리 내 품에 아이를 안고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깊은 밤 내가 잠든 줄 알고 돌아가신 시어머니께 아이를 도와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던,

내 앞에서는 너무나 의연했던 남편의 짐도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차도가 전혀 없던 아이의 언어반응, 감각예민성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은 언어 선생님한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눈을 맞추기 시작했고,

선생님에게 자발적인 한 두 마디를 하기 시작했다.

또 커다란 기구들 때문에 무서워했던 감각통합실에 엄마 없이 들어가게 됐고,

선생님 지시대로 감각통합 활동들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우리 아이가 가르쳐 주는 대로 성실히 따라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아이가 진전을 보이자 남편은 망설이지 않고 ㅇㅇ소아정신과 치료를 종료했다.

두 치료기관을 병행하면서 두 기관의 대처를 비교하게 됐는데,

오은영 아카데미의 선생님들이 더 전문적이고, 아이에게 반응적이었기 때문에

ㅇㅇ소아정신과 치료를 중복할 이유가 없었다.

그제야 한 달 치료비가 180만 원 정도로 줄어서 숨을 쉴 수 있었고,

차도를 보인 아이가 앞으로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후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되는 죄 많은 결심을 지워 버렸다.


물론 아이는 이전보다 좋아졌을 뿐 여전히 사람들과 길게 대화하지 못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만 일 년 넘게 그리고, 사람의 눈동자를 텅 빈 동그라미로 그렸다.

아이와 같이 다른 걸 그려보고, 눈동자를 채워봐도 아들은 다시 자동차, 텅 빈 눈동자 그림으로 돌아갔다.

내 아들의 그림은 또래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 확연히 달랐다.


우리 아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사람 얼굴은 이렇구나 싶어서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멍해졌다.

왜 이런 그림들을 그리는지 원인을 몰라서 절망했고,

왜 내 아이가 이래야 하는지 미친 듯이 화가 났고, 아이가 평생 이럴까 싶어서 슬펐다.

그 당시 나는 아이의 증상들을 직면할 때마다 감정에 압도당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센터 선생님들의 피드백과 효과적인 가정치료들을 수첩에 적어와서

기계적으로 열심히 아이에게 수행했다.

나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센터 선생님들의 생각에 의존해서 아이를 치료하려고 애썼다.


센터를 마치고 지쳐서 집에 돌아온 아들을 그저 이뻐해 주는 엄마 역할로 충분했을 텐데

나는 집을 센터의 연장선으로 만들어서 어설픈 치료자 역할을 자처했다.

조그맣던 우리 아들은 그때 얼마나 몸과 마음이 고달팠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센터 일정에 맞춰 아이를 챙기고, 먹이고, 내 슬픔과 아이 짐을 배낭에 넣어서

아이 손을 잡고 걷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며 하루를 견디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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