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옙스끼의 '멸종위기사랑'

도스또옙스끼 『가난한 사람들』 깊이 읽기

by 오승주 작가

바르바라는 왜 사랑의 종말론을 노래한 걸까?


한 후배가 있었다. 서울에서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가끔 휴가를 내서 제주에 오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비행기 편도 값을 내주기도 했다. 술자리에서는 ‘교회 그녀’ 이야기가 업데이트되었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좋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후배는 교회 그녀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과감히 대시하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하자 나는 신나게 놀려주었다. 후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N포세대는 사랑도 사치”라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랑이 조용히 멸종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확 띄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사랑은 희박해졌고, 때로는 그 자리를 혐오가 대신했다.

▲ 유난히 여성 캐릭터에게 가혹한 성격과 운명을 부여한 도스또옙스끼


『가난한 사람들』은 인기 드라마 <나의 아저씨>처럼 ‘조금 덜 생긴’ 중년의 아저씨와 20대 젊은 여성의 러브 스토리다. 얼핏 보면 ‘통속 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역사적인 작품이자 뼈대 있는 계보를 이루는 도스또옙스끼의 데뷔작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러시아 리얼리즘 소설가 고골의 소설 『외투』를 업그레이드한 작품이다. 『외투』는 가난한 9등관 하급 관리가 외투를 어렵게 마련하고 하룻밤 만에 빼앗기고 목숨을 잃은 비참한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은 중년의 하급 관리 제부시킨은 20대 엘리트 여성 바르바라를 연민하고 사랑하며 희로애락을 느끼며 문체와 비평 능력을 점점 발전시키는 성장형 캐릭터이다. ‘새 외투 장만’이라는 목표를 위해 모든 삶과 욕망을 유보시키는 『외투』의 하급 관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보다 더 깊고 커다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제부시킨의 고통이 배가된 까닭은 바르바라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멸종되었을 뿐 아니라 바르바라의 잠재적 사랑도 지주에게 시집가는 순간 멸종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부시킨과 편지를 주고받는 빈곤하고 병약한 여성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는 몰락한 귀족 출신이다. 두 사람은 쉰다섯 통의 편지를 나누었고, 그 안에 <바르바라의 수기>가 삽입돼 있다.

제부시킨은 나이는 많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숙맥이다. 사랑을 처음 하는 사람, 특히 남자의 경우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는 황홀감에 마음을 빼앗겨 간과 쓸개를 모두 꺼내주곤 한다. 제부시킨은 바르바라에게 간과 쓸개를 다 꺼내줄 뿐 아니라 심부름꾼 노릇을 자처한다. 그것이 부정(父情)인지 연정(戀情)인지 스스로 헷갈려 하지만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는 못한다.

바르바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경험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간 존재는 가난이었다. 바르바라는 제부시킨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거래’를 선택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젊은 포크롭스키의 후견인인 늙은 지주 브이코프에게 시집을 가기로 한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도스또옙스끼 작품세계의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로서 매우 입체적일 뿐 아니라 불가해한 존재이며 남자를 능숙하게 다룬다. 그는 제부시킨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고, 결혼 결심 후 혼숫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제부시킨에게 온갖 잔심부름을 시켰다.

바르바라는 ‘멸종 위기 사랑’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제기하고 있다. 바르바라는 ‘가난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포크롭스키가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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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제주4.3 교육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기반으로 아동, 청소년, 성인과 소통합니다. 기고/강의 관련 문의는 dajak97@hanmail.net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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