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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사진관 Oct 30. 2018

신사의 나라에서 이러시면 안되죠

일요일의 게으름 _ ep05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로 찾아오는 이동도서관 버스에서 먼 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세계를 경험했던 나에게 영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신사의 나라였다. 여왕이 있는 기품 넘치는 나라, 장난감 병정같은 근위병들이 왕궁을 호위하는 나라, 빨간 전화 박스로 가득한 나라, 바바리코트를 입은 신사들로 가득한 나라.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 머릿속 영국은 여전히 신사의 나라였고, 영어 전공자로서 어학 연수지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큰 고민 없이 신사의 나라를 택했다. 그렇게 영국을 글로 배운 대학생은 신사의 나라에 대한 격한 동경을 품은 채로 영국 어학연수 길에 올랐다.     


짐을 찾고 공항에서 나오자 느껴지는 바람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신사의 나라 특유의 기품 넘치는 발음이 영국에 도착했음을 실감 나게 했다.      


‘후후. 그럼 어디 신사의 나라를 한번 탐방해 볼까?’


하지만 20년 넘게 씌워 둔 신사의 나라라는 필터는 단 하루 만에 벗겨지고 말았다. 이 나라의 신사들은 모두 색맹인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무단횡단을 해댔다. 날씨도 비신사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우산도 없는데 예고도 없이 내리는 비는 웬 말이며, 허둥지둥 우산을 구입했는데 그치는 비는 또 웬 말?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월에 눈이 내리지를 않나, 분명 사계절이 있다 들었는데 일 년에 사계절이 아닌 하루에 사계절이 있는 듯했다. 또 물가는 왜 그리 비싼지 (당시 파운드 환율은 2500원을 육박했다.) 교통비다, 밥값이다, 맥주 값이다 주머니가 두둑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대중교통이었다.      


뚜벅이 어학 연수생에게 대중교통은 공기 같은 존재였다. 심지어 처음 지냈던 홈스테이 마을은 너무 시골이라 영어 학원에 가려면 산 넘고 물 건너 버스를 타고, 기차도 타야 했다. 그런데 정류장에 붙어 있는 시간표는 장식으로 달아 둔 것인지 이놈의 버스는 제 멋대로 도착하기 일쑤였다. 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은 기차를 40분 이상 기다린 적도 있다.      

매일 아침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 마음은 지각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했다. 더 환장할 일은 버스표는 왜 버스 기사 아저씨가 파는 것이며, 기사 아저씨는 왜 모두가 자리에 앉지 않으면 출발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인지.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멈춰있지 않아도 되니깐 빨리 가란 말이다!! 난 이런 황송한 대접에 익숙하지 않단 말이다!!’      


버스카드를 삑 찍기가 무섭게 출발하는 버스를 가로질러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며 자리를 찾아가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배려심 넘치는 버스는 속 터짐 그 자체였다. 가끔 휠체어에 탄 사람이 버스 정류장에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여느 때처럼 안전벨트를 풀고 버스에서 내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에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물론 여기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빨리빨리에 익숙한 게으르나 성미가 급한 나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긴 시골이라 그래. 런던은 좀 다를 거야. 대도시고 관광 도시니깐.’     


하지만 런던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루는 갑자기 앞을 향해 달려가던 지하철이 멈추더니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아. 안내 말씀드립니다. 앞 열차에 문제가 생겨 이 열차는 다시 전 역으로 돌아갑니다. 급하신 분은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세요.”      


‘Stop kidding me!!’     


헉. 내 약속 장소까지는 단 두 정거장 밖에 안 남았는데. 뒤로 간다니. 믿을 수 없었고 화가 났다.      


“STUPID!!!”      


화가 났다.

화가 났다.

그리고 화가 났다.      


하지만 열차에서 화가 난 사람? 나뿐이었다.

방송대로 열차에서 내린 급한 사람? 나뿐이었다.     


‘아니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지? 신사의 나라가 뭐 이래? 맘대로 지하철이 멈추지를 않나, 어떨 때는 노선이 갑자기 변동되지 않나, 기차의 플랫폼이 열차 도착 1분 전에 바뀌지를 않나, 대체 내가 상상해 온 신사의 나라는 어디로 간 거지?’     


그렇게 몇 차례의 계절이 바뀔 즈음, 나는 더 이상 전광판에 갑자기 뜬 ‘delay’라는 글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표를 사는 사람들 때문에 지체되는 시간에도 태연할 수 있었다. 그랬다. 예고 없이 비가 내리면 우산을 펼치는 호들갑 없이 쿨하게 비를 맞고, 기차가 30분 늦게 오는 것쯤은 쿨하게 이해하고, 열차의 노선이 갑자기 바뀌어도 화내지 않는 신사로 가득한 영국은 과연 신사의 나라였다.  

오히려 신사의 나라에서 이러면 안 되는 사람은 참을성 없는 투덜이 한국인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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