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063
눈을 뜨니 아직도 새벽.
배고픔을 끌어안고 다시 몸을 누인다.
버스 안은 마치 옷가지들이 쌓인 것처럼 모두가 한 무더기다.
차창 밖은 어둠뿐이다.
다시 일어나니 차가 서서히 멈춰 서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7시가 조금 안됐다.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하나둘씩 생명을 되찾고 일어난다.
차에서 모두 내리길래 따라 내렸더니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게 여권을 내고 있다.
아, 이게 인터넷에서 본거구나.
나도 미리 준비했던 3달러를 여권 사이에 넣어줬다.
어쩔 수 없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법.
수상한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환전을 하란다.
라오스 돈은 이미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바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심한 바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항상 좋기만 할까.
다시 화폐의 단위가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크다.
1달러가 2만동.
버스는 우릴 내려놓고 먼저 국경으로 향한다.
무리를 졸졸 따라서 걸으니 커다란 게이트가 보인다.
말로만 듣던 라오 바오(Lao Bao) 국경.
여권을 돌려받았더니 출국 도장만 찍혀있다.
아직 베트남 입국이 아니구나- 해서 조금 더 걸어가니 또 다른 국경 사무소가 있다.
엄청 많은 사람들이 서로 새치기에 새치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을 보니 다들 또 여권에 돈이 끼워져 있다.
나는 수중에 남은 돈도 없었고, 문득 한번 해보자는 배짱이 생겼다.
일단 줄을 섰다.
앞을 보니 검문소에서 한 유럽 여성이 울고 있다.
여권을 내줬는데, 한참이 지나서도 못 돌려받고 있다.
영문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큰 가방을 짊어진 채로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저거구나.
그래, 한번 부딪혀보자.
이상하리만큼 나는 가끔 겁을 상실할 때가 있다.
아마 이 당시가 또 그랬던 것 같다.
내 차례가 되니 역시나 사무소 직원이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서 한참 동안 여권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아마 사이에 있어야 할 돈이 없다- 뭐 이런 거겠지.
그래도 내가 멀뚱하니 계속 서있자 이제는 애꿎은 여권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나를 노려본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정말 무서운 눈매로 계속 나를 노려보던 그를 향해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거의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직원은 이제 내 여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물론 여전히 자리에 그냥 서서 꿈쩍도 안 했다.
다시 차분해졌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겠다.
악법도 법이라지만 부패는 부패일 뿐이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괜히 부당함에 홀로 맞서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불쾌감이 가득한 노골적인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결국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쾅!
여권을 받아 들고 돌아서니 뒤에 한참 줄을 선 베트남인들도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오늘만큼은 똥배짱의 승리다.
먼저 국경을 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로 돌아왔다.
당당하던 나의 모습은 멀미와 사람들에 치일 생각을 하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버스는 한참을 또 달렸다.
훼(Hue) 근교에 다다른 버스는 다시 멈춰 섰다.
우르르 내려서 사람들이 이번에는 도로변에 위치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뭔가 하얀 종이를 하나씩 내놓고 밥을 받아간다.
이 녀석들이, 나는 좌석도 안 주더니 결국 식사를 위한 쿠폰도 안 줬다.
얼굴은 이미 오만상으로 일그러졌지만 얌전히 따로 돈을 내고 사 먹었다.
외로워서 억울한지, 억울해서 외로운지 모르겠다.
일단 가자.
아저씨와 아줌마들 사이에서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아가씨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판을 들고 옆으로 가 앉았다.
그녀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나는 절박함으로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거의 팬터마임을 하듯이 얻어낸 정보는 이 버스가 도심과는 상당히 떨어진 터미널로 간다는 것.
지난 20시간 정도는 계속 구겨졌던 얼굴은 이제 그냥 내 얼굴이 된 것 같았다.
그녀에게 몸짓으로 사정하며 그녀에겐 필요도 없는 50밧을 쥐어주고 함께 택시를 타기로 했다.
치익- 치익-
드디어 버스는 목적지인 베트남의 다낭에 도착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일단 터미널 주변을 보니 상황이 더 악화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단 그녀를 따라서 무작정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나를 도심으로(그러나 내 목적지와는 한참 상관이 없는) 데려다줬고
별 말없이 눈인사를 하며 그렇게 떠나갔다.
곳곳에서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비로소 베트남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스쳐가는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말소리와 톤도 많이 바뀌었다.
낯선 기분으로 한 시간 정도를 헤맨 끝에 바다 근처에서 숙소를 잡았다.
당장 게스트하우스도 못 찾겠고, 지친 심신도 달랠 김에 처음으로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몸을 뉘었다.
여전히 창밖에선 쉴 새 없이 경적소리가 울린다.
다시 모든 게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