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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시간의 틈

SF소설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밤이 내려앉은 창덕궁.


처마 끝을 스치는 달빛, 기와 사이로 은빛 실오라기가 흐른다. 수백 년의 침묵을 품고 어둠에 잠긴 돌담. 시간 위에 쌓인 층처럼 깊은 이 밤의 고요.


연못 위로 달그림자가 일렁인다. 흰 연꽃들이 꿈처럼 떠 있고, 꽃잎 위의 이슬방울들이 작은 별처럼 빛난다. 바람은 속삭이고, 은행나무는 대답한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


촛불 아래, 정조가 홀로 앉아 있다.


스물넷. ‘왕세손’이라는 이름 아래 갇혀 할아버지 영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채, 그는 기다린다. 기다림은 고통이자 의무다.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하다.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또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침묵이 방 안을 채우고, 촛불 아래 눈동자가 깊어진다. 부드러운 입매 위로 그림자가 춤추고, 이마의 주름에는 견딜 수 없는 무게가 새겨져 있다.


고개를 들자 달빛이 턱선을 그린다.


"아버지."


목소리 없는 부름.

입술만이 움직이고, 촛불이 흔들린다.

벽 위의 그림자가 찢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열세 해 전, 그 여름. 뒤주 안의 절망. 영조의 명으로, 할아버지의 차갑고 확고한 의지로.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 죽음이 스며든 시간을 견뎌내는 일.


정조 나이 스물넷. 곧 왕이 될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은 여전히 웃고 있다. 현실 속에서도, 꿈속에서도.


"이 길고 긴 밤을 어찌 견뎌야 하나. 아버지의 한을 어떻게 풀어드려야 하는가."


창을 연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고, 후원의 소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숨 쉰다. 수백 년을 견뎌온 나무들.

아버지도, 영조도, 그리고 그 이전의 모든 이들도 바라보았을 나무.


나무는 살아남았다.

사람은 스러졌다.


그때였다.

하늘이 흔들렸다.


별들이 물결처럼 움직인다.

무수한 빛의 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우주가 숨을 쉬는 것처럼.


정조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하늘에 금이 간다. 공간이 찢어지고 시간이 비틀린다. 보이지 않는 힘이 대기를 가르며 소용돌이친다.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는 소리.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감지하는 진동.


시간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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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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