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 and R Aug 26. 2021

『존재하는 신』 - 앤터니 플루


    2006년은 '새로운 무신론'의 해라고 불릴 정도로 무신론 옹호서가 쏟아져 나왔고 그 책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와 샘 해리스, 대니얼 대닛, 크리스토퍼 히친스까지 이들이 '새로운 무신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다. 무신론자들은 언제나 존재했을 텐데 2006년에 갑작스럽게 부상한 이들을 '새로운 무신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뭘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사악하고 유해한 것으로 본다. '종교에는 단 하나도 유익한 것이 없다'는 주장이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가장 주요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를 선두에 내세우며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과학적으로 우주와 생물, 인간의 탄생을 설명했으니 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발심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과학 자체를 거부하고 진화론 자체를 거부하는 현상이 꽤 오래 지속됐다. 나 또한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에서 창조과학(창조론 중 일부)과 진화론을 빙자한 진화주의를 비교하며 무엇이 더 과학적인지 이야기하는 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출발 자체가 잘못된 논의다. 창조과학은 유사과학일 뿐이고, 진화주의는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이론에 철학적 주장을 담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창조과학은 엄밀한 과학이 아니고 진화주의 또한 과학이 아닌데, 서로 더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며 한쪽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한쪽은 신이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시도인데, 심지어 둘 다 과학이 아니니 이것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논의다.

    하지만 점차 교회 안에도 진화주의와 진화론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과학이 이 세상의 어떤 원리를 밝혔다고 해서 과학이 그것에 가치와 의미, 목적까지 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논의가 더 궁금한 사람은 데보라 하스마와 로렌 D. 하스마가 공동으로 지은 『오리진』을 보기 바란다.


    앤터니 플루의 『존재하는 신』으로 돌아와 보자. 새로운 무신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최고의 악명을 떨치던 무신론 철학자는 앤터니 플루였다. 1923년에 태어난 앤터니 플루는 십 대 때 무신론의 길로 들어가 2004년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30권이 넘는 책을 출판하며 무신론 진영의 대표 철학자 자리를 지켰다. 거의 평생에 걸쳐 무신론자였던 철학자가 어떻게 노년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됐을까? 사실 최고의 지성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는 논리와 이성을 다해 고민한 끝에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자신의 믿음을 바꾼 사람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는 C.S. 루이스도 철저한 무신론자였었다. 성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정직했을 뿐이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무신론과 유신론의 논리를 정직하게 비교했을 때 무신론보다 유신론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앤터니 플루도 마찬가지다. 논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는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실천한 것뿐이다.

    앤터니 플루가 2004년에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을 때 당연하게도 무신론 진영에서는 조롱과 비난을 쏟아냈다.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들며 죽을 때가 되니 두려움 때문에 회심했다고 한다든지, 파스칼의 내기에 참여했다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파스칼의 내기란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논증을 확률로 접근한 것에 대한 이름인데,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신을 믿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이롭다는 논리다.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신을 믿어도 잃을 것이 없다. 그런데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지 않았을 때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앤터니 플루는 자신이 결코 파스칼의 내기에 의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앤터니 플루 자신이 무신론자일 때 어떤 논리와 근거로 무신론자였는지 말하고 있다. 2부는 유신론으로 입장을 바꾸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앤터니 플루가 무신론자일 때 믿었던 것과 길고 긴 사유와 토론의 과정을 통해 유신론으로 돌아서게 된 이유를 담고 있는 책이다.

    앤터니 플루는 십 대 때 무신론을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악의 문제라고 한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한 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정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주제는 선한 신과 악의 공존 문제에 대한 아주 오래된 담론이다. 신학자들은 신정론에서 선한 신과 악의 공존 문제를 변론할 때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유로 든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었는데 그것을 악용한 인간 때문에 세상에 악이 들어왔다는 논리다. 하지만 앤터니 플루는 당시에는 이마저도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98년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와의 토론회에서 앤터니 플루가 어떤 이유로 자유의지 변론을 인정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앤터니 플루는 이 토론회에서 '전능한 신이라면 악한 선택을 하지 않고 오직 신의 뜻에 합당한 선택만 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자유로운'이라는 말과 '신의 뜻에 합당한 선택만 하는'이라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앤터니 플루의 주장대로 신의 뜻에 합당한 선택만 하는 인간이라면 결국 그런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앤터니 플루의 이런 주장은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논리적 모순이 자명한 것도 신에게는 가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신의 전능함을 오해한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뾰족한 원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과 같다. 논리적 모순은 하나님한테도 불가능하다. 불가능이라는 말을 하나님한테 썼다고 해서 불경건하다고 느끼는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신이라는 본질을 버리고 스스로 소멸해버릴 수 있는가? 이것 또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논리적 모순까지 가능한 능력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앤터니 플루와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했다. 이 책 1부 3장 <차분히 검토해 본 무신론>이라는 부분에서 말한 것인데, 앤터니 플루는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한 도전과 비판에는 형편이 허락하는 한 응답해야 할 지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앤터니 플루는 자신의 주장에 반론이 들어온다면 인정할 건 인정하고 동의할 수 없는 반론에는 그 이유를 성실하게 답변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태도가 앤터니 플루를 유신론자들과의 대화의 장에서 떠나지 않게 했고, 끊임없는 대화와 공개 토론의 연속에서 앤터니 플루의 회심을 이끌었지 않나 싶다. 앤터니 플루가 무신론자였지만, 새로운 무신론자들과는 결이 다르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귀를 닫고 자신들의 주장만 주야장천 말하고 있다. 앤터니 플루와 대조적으로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대화가 되지 않는다.


    앤터니 플루가 신을 믿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자연이 법칙을 따른다는 것. 둘째, 물질에서 행위의 주체가 되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이 생겨났다는 것. 셋째, 무에서 유가 생겨났다는 것.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자.

    첫째, 자연법칙은 누가 만들었을까? 자연법칙이란 물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데, 과학은 자연법칙을 밝힌다. 하지만 그런 자연법칙이 도대체 왜 그렇게 형성되었고 왜 그렇게 일정하게 자연법칙이 유지되는지는 과학의 범위를 넘어선다. 앤터니 플루는 자연법칙의 일률성을 보면서 신의 존재가 자연법칙의 일률성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지성이 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가 어떻게 지성을 갖고 있고 자기 복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들을 낳을 수 있을까? 무신론자들은 우주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이런 일이 우연히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무신론자들의 이런 주장은 무생물인 대리석 테이블이 1조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결코 대리석 테이블은 생명이 될 수 없다. 앤터니 플루는 이런 무신론의 주장을 거부했고, 우주의 역사 속에서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을 신의 존재의 이유로 결론 내렸다.

    셋째,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있을까? 현재 우주 기원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은 빅뱅이론이다. 앤터니 플루는 무신론자로서 대폭발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빅뱅이론은 마치 창세기의 첫 문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우주의 시작도, 끝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우주를 만들어낼 다른 무언가를 가정할 필요도 없었는데, 빅뱅이론은 우주의 시작을 이야기했고, 결국 앤터니 플루는 신의 존재를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됐다.


    나는 앤터니 플루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옹호해오던 무신론을 버리고 유신론으로 돌아선 사람이다. 말이 쉽지 사실 자신의 평생의 업적을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앤터니 플루는 정직하길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결코 노년에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것이 아니다. 파스칼의 내기에 따른 것도 결코 아니다. 앤터니 플루는 논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는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실천한 것뿐이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앤터니 플루는 기독교적인 유신론이라기보다는 이신론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논증에 따라 움직이길 원했던 앤터니 플루가 결국에는 기독교적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 싶다. 부록에 톰 라이트의 글을 실으며 그의 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봤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믿음이 결코 합리성과 논리성에서 무신론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을 믿는 믿음은 무신론보다 압도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