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가끔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언제지?"
아침 볕이, 촘촘한 도심 빌딩 숲의 유리 벽을 지나고 도시를 가르는 트램의 지붕 위를 지나서 반쯤은 퇴색한 빛으로, 늙은 건물의 벽을 비추는 시간. 또는 움직이는 모든 사물의 크기를 끝 닿을 곳 없이 늘려 버리는 오후 4시 언저리.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그 어디 즈음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이후, 내 자신 또는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물어 오면 나는 늘 시계의 숫자가 아닌 어떤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낯선 도시의 게스트하우스 창가에 앉아 마지막 여행객이 젖은 발로 모래를 털며 들어오는 것을 보는 시간, 혹은 하루의 영업을 마친 작은 식당 주인이 문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먼 산을 바라보는 뒷모습을 마주할 때, 또는 노란 앞치마를 두른 어느 카페의 직원들이 리스본의 나이 든 골목길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긴 호흡으로 담배 연기를 빨아 들일 것 같은 시간들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순간들은 모두 하루가 다른 얼굴로 갈아입는,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중 유독 마음이 떠나기 싫어하는 시간, 어쩌면 시간이라기보다 차라리 내 감각이 절정에 이르는 어떤 찰나의 순간들이었던 같습니다.
제게는 일본 작은 소도시에서 만난 저녁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도시였습니다. 며칠간의 소란스러운 여행에 지쳐, 지도 위에서 가장 조용해 보이는 이름 하나를 골라 무작정 기차에서 내렸을 뿐입니다. 그 작은 마을에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고, 작은 운하와 하얀 벽의 낡은 창고들이 오후의 햇살을 찬연하게 반사한다는 사실도 그곳에 도착해서야 알았습니다. 이제 막 하루의 빛나던 시간을 지난 햇살은 서서히 기운을 잃고 비스듬히 운하의 수면 위로 길게 드러눕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흘끔거리며 정처 없이 걷다가, 불 켜진 작은 찻집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창가 자리에 앉으니 삐걱이는 나무 창틀 너머로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와, 검은 기와지붕들이 오후의 빛을 받아 아름다운 곡선을 이뤄, 마치 하나의 잘 이어진 능선처럼 보였습니다. 찻잔의 김이 모락거리는 너머로, 풍경은 서서히 강렬했던 채도를 잃어갔습니다. 파랗던 하늘은 보라색이 되었다간 이내 짙은 남색에서 다시 분홍으로 변해 갔습니다. 평온함이 밀려왔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저는 완벽한 이방인이자, 동시에 그 풍경의 온전한 일부가 된, 묘한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왜 이름 없는 여행자는 이토록 낯선 곳에서, 이토록 외로운 시간에 오히려 깊은 안도를 느끼는 걸까요?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사회가 우리에게 입혀놓은 수많은 역할의 갑옷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라는 존재로부터의 완벽한 해방. 그곳에서 저는 그저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자유로움의 감각이, 어쩌면 내가 이곳을 찾은 가장 깊은 이유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작은 소도시의 느린 카페에서 한참을 무념의 상태로 찻잔과 풍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찻집 주인이 작은 등불 하나를 들고 나와 처마 밑에 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번져 나오는 그 희미하고 따뜻한 불빛을 보는 순간, 뜬금없이, 생각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해가 저물도록 골목에서 노는 아이를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 밥 짓는 냄새가 섞여 있던 희미한 공기, 골목마다 웅크리고 앉아있는 저녁의 냄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과 따뜻한 집이 기다린다는 안도감이 뒤섞였던 그 시간의 감각. 내가 앉아있는 이 찻집 창가는 순식간에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제 유년의 골목 어귀와 겹쳐졌습니다.
여행지의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현재로 불러내는 거울 같은 걸까요?
낯선 풍경은 종종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나, 잊고 있던 기억,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줍니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과 대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는’ 경험이라기보다, 익숙한 나에게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경험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마 당신에게도 그런 장소, 그런 시간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꼭 멀리 떠난 여행지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퇴근길, 버스 창문에 기댄 채 도심의 조명을 받아, 형형색색의 물줄기로 도심을 흐르는 강물의 풍경을 바라보던 순간일 수도 있고,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깨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순간일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세상의 속도에서 한 발짝 비켜나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그 ‘경계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 멈춤의 시간 속에서 흩어졌던 자신을 다시 그러모으고, 내일로 나아갈 희미한 빛을 발견하곤 하니까요.
어둠이 완전히 내린 뒤에야 저는 찻집을 나섰습니다. 등불이 내걸린 거리는 아까와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 시간은 반드시 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붙잡을 수 없기에, 사라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찰나의 빛을 온 마음으로 껴안게 되는 것일 테고요.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황혼이라는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짧은 시간 동안만큼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세계의 문법이 잠시 멈춘 그곳에서, 아주 잠깐 다른 삶을 꿈꾸는 영혼의 자유로움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자유는 어쩌면 물리적 방임이 아닌 정신적인 유속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잠시 손을 놓고,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 넣고, 깍지 낀 양손으로, 목을 받친 채 길게 누워 봅시다. 그곳이 우리를 현실이라는 유빙 속에서 잠시 온화한 남쪽 나라로 인도하는 일상의 여행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