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힙타령

by 데미안

소문대로 힙하고 트렌디한 남영동이었다. 특색 있는 분위기의 맛집들이 즐비한 동네라더니 과연 그랬다. 다 낡아 쓰러질 듯한 건물마다에 걸린 간판들이 특히 생경했는데, 국적도 시대도 뒤죽박죽인 느낌이라 겉만 보아서는 당최 뭐 하는 곳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퀴즈라도 풀듯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제야 진짜 속내를 보여주는 상점들의 재미란.

소품샾 같던 곳은 빵집이었고, 카페인 줄 알았던 곳은 술집이었다. 일본어만 잔뜩 적힌 식당도 있었다. 이날 우리가 찾은 카페 역시, 카페라기엔 어딘가 어색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한 번쯤 들러보고 싶단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카페의 이름은 ’남영 출판사’, 40년 된 출판사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잔뜩 신이 나 침을 튀기며 힙타령을 하는 내게 유현이는 장난스럽게 힙, 트렌디, 핫 3종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농담이라곤 해도 적절한 처사다. 힙이 뭔지도 모르면서 힙부터 찾는 아저씨란 젊은 세대의 유행어를 훔쳐 쓰는 기성세대만큼이나 꼴불견이니까. 어느덧 나이 들어 버린 나는 유행과는 멀어질 대로 멀어져, 평소 신기한 것만 보면 무턱대고 힙부터 외치는 촌스런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늘상 부르짖던 힙이란 말도, 이번만큼은 그저 신남의 표현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모처럼만의 나들이로 들뜬 마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고, 거기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재이가 다섯 살이니, 이런 동네를 와본 건 못해도 5년 만이다. 설명하기 쉽지 않은, 그래서 아무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재이의 사연으로 우리의 외출 반경은 과천이 고작이었다. 큰맘 먹고 멀리 나가보아야 안양, 양재, 강남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한 달에 한번 연차를 써야 가능한 호사였다.

재이가 태어난 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과 여유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왜 좀 알아주는 멋진 동네는 모두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건지, 그곳까지 놀러 가기엔 늘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기껏 휴가까지 내고 이동하는 데에 시간을 몽땅 허비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설사 시간이 허락한다 하더라도 재이와 함께 가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휠체어가 지나다닐 수 있는 정비된 길, 지붕이 있는 주차장, 미리 챙겨 온 그라인더로 음식을 갈아 주어도 무방한 넓고 붐비지 않는 마음 여유로운 식당, 재이를 누일만한 공간이 구비된 휴게 공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태산이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하다 보면 원치 않더라도 마음부터 꺾여 쉬이 포기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남영동은 4호선을 타면 삼십여분이 걸리는 접근 가능한 핫 플레이스였고, 그 덕분으로 우린 오래간만에 낯선 곳에서 색다른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서 먹던 파파존스 말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테라스에서 무려 이탈리아 정부가 인증했다는 화덕 피자를 먹었다. 평소 즐기던 동네 카페의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대신 남영 출판사의 시그니처, 레몬 셔벗이 올라간 커피도 마셨다. 자그마한 빵집에서 구매한 한라봉 향의 호밀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달랑거리며,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유도 한껏 부렸다. 그러다 이국적인 풍경이라도 만나면 눈치 보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꼭 오랜만에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불쑥 억울한 마음이 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하필 날씨마저 완벽했던 남영동에서, 나는 문득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부끄러운 질투심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런 곳을 자주 다니면서 점심도 먹고, 저녁엔 술도 마시고 한다는 거 아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평일 저녁의 약속 따윈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고, 주말 내내 재이와 집에 머물러도 심심치 않다고 얘기했던 나였다. 비록 스치듯 지나간 생각일지라도, 평소의 다짐과는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조금 미워졌다. 내내 신났던 기분이 순간 가라앉아 버렸다.


슬쩍 이런 내 속마음을 고백하자 별 말 없던 유현이가 후에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전에 오빠가 여기저기 돌아다닌 건 아니지 않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새로움 앞에서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나의 성향은 데이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주말이면 별 계획도 없이 티브이나 보며 시간을 때운 날도 많았고, 멀리 놀러 가자 말하던 유현의 말을 이런저런 핑계나 대며 외면하기도 했다.


학업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고3 시절, 쉬는 시간마다 즐겨했던 온라인 야구 게임을 눈물을 머금고 삭제한 적 있다. 다신 되돌릴 수 없도록 아이디까지 지워버렸다. 그렇게 재미있던 게임이었건만, 수능이 끝난 날 곧바로 달려간 피시방에서 다시 마주한 야구 게임은 어쩐지 싱겁고 아무 감흥도 없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종종 어떤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금지되었기 때문에 갈망한다고 라캉은 말했다. 그 게임을 재미있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공부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상황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파파존스도 좋아하고, 우리 동네 커피 체인점 커피인류의 커피도 좋아한다. 지금 내 인생에서 ‘매일의 일상’과 ’가끔의 이벤트’를 바꿀 수 있다면 과연 마냥 행복할까 상상해 본다.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다. 바쁘고 소란스런 하루의 끝에서 되려 공허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날 남영동에서 내가 느낀 간만의 설렘은 모두, 재이와 함께하는 충실한 나의 일상 덕분으로 돌려도 괜찮을 것이다. 빛이 닿지 않는 씁쓸한 순간 몇 있었기 때문에 이 잠깐의 나들이가 그토록 달았던 거라고. 그리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지금 누리는 순간들에 한없이 고마워졌다.


벌써 세시, 잠깐의 여행을 마치고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비 예보가 무색하게 여전히 바람이 맑고 하늘은 싱그럽다. 행여 지하철을 놓칠까, 나는 유현이의 손을 잡고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있는 힘껏 가로질러, 달린다. 손이 자유롭지 않아 자세가 우스꽝스럽다. 누가 보아도 힙과는 거리가 먼 뜀박질이다. 나는 오른편 함께 달리는 유현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해 본다. 웃음이 한가득이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 나 역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아무렴 어때. 나는 지난 남영동 힙타령을 뒤로 한채 지금의 우리를 마음껏 사랑하기로, 숨을 헐떡이며 또 한 번 다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