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숨 쉬는 법을 잊게 되는 걸까?
나는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오래된 들판 끝에서 돌담을 만났다. 그 돌담은 내가 늘 보던 담벼락들과는 조금 달랐다. 낙서도 없었고, 금도 별로 없었고, 무언가를 오래 바라본 사람처럼 조용하고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멈춰 섰다.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 것도, 어디에서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은, 걸음을 멈추고 싶었을 뿐이다.
돌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쉬어도 괜찮아.’ 그래서 나는 말없이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 풀숲이 사르르 흔들리더니 햇빛 같은 아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아이의 이름은 화사였다. 앞니가 하나 빠졌고,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해바라기 모양의 노란 핀을 꽂고 있었다. 말할 때마다 바람이 새듯 웃었고, 눈동자에는 매번 무언가 새로 반짝이는 게 하나씩 더 생겼다. 마치 세상을 매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너도 돌담 보러 왔어?” 화사가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냥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뿐인데, 화사의 말에는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걷고 있었는데… 발이 멈췄어.”
“왜?”
“잘 모르겠어. 근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돌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쩌면 세상은 너무 커서, 작게 숨 쉬는 법을 잊게 되는 걸까?”
화사는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 사람, 나도 많이 봤어. 그래서 다들 여기 앉아보는 거야. 돌담은, 숨 고르는 데 좋은 친구거든.”
나는 조용히 돌담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어쩐지 마음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바람도 조금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화사는 돌 하나를 발끝으로 톡 찼다. “여기, 그냥 돌로 만든 담 아니야. 이 돌들엔 다 이름이 있어.”
“이름?”
“응. 슬픔이라는 돌, 기쁨이라는 돌, 실패라는 돌, 사랑이라는 돌…”
화사는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마치 오래 사귄 친구들을 소개하듯 말했다.
“넌 왜 여기 왔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잘 몰랐으니까.
화사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왔는지도 모른 채 여기 멈춰 서거든.”
그 말에 내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럼… 돌담은 왜 여기 있는 걸까?”
화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 누가 넘지 않아도, 누가 기대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돌담은 그냥 여기 있어. 누군가를 막으려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잠시 기대 쉬라고 있는 거 아닐까?”
나는 그 말이 어딘지 울컥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방과 후마다 화사와 함께 돌담 앞에 앉았다.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가끔은 하루의 기분을 작은 돌멩이처럼 꺼내어 돌담 앞에 놓아두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천천히, 돌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슬픔은 마음을 약하게 만들지 않고 실은 마음을 깊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아주 오래된 돌 하나가 나에게 처음 들려준 조용한 속삭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