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머리끈과 ‘기대되는 나’의 무게
햇살은 이미 창문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젯밤 남자 손님의 감정은 이류의 손끝도, 바닥 가운데 문양마저도 조금은 더 차분해지게 만든 듯했다. 아침 교육을 마친 세정술사들은 세탁소 한쪽에서 각자 마지막 실습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호 씨, 오늘은 네가 메인 필터해.” 이류가 당부했다.
준호는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렸다.
“오늘은 내 안에 뭐가 남을지 기대 안 하렵니다…”
경희는 스티커 메모 패드를 들여다봤다.
> 손끝 따가움, 손님 감정 진폭 대비,
> 진입 각도 조절.
지훈은 문가에서 손님 기척을 살폈다.
‘오늘은… 아까보다 덜 흔들린다.
남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는데.’
“들어온다.” 지훈이 입을 열자 곧 유리문에 검은 코트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허리를 잔뜩 움츠리고 주먹을 꼬옥 쥐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끈으로 엉성하게 묶인 머리카락이 마치 풀려버린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문 위로 타자기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 감정 세탁소
>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이다.
이류가 다정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 어떻게 오셨나요?”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방금 전까지, 회사 화장실에 있었어요.
누가 내 흉을 보던 소린지,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예민한 건지…”
여자가 고개를 떨구었다.
“칸막이 너머에서 제 이름이 한 번 나왔거든요.
‘요즘 저 사람, 너무 예민한 거 아냐?’ 딱 그 말까지만 들었는데도, 나머진 제 상상으로 다 채워졌어요.”
“예전에도요… 화장실 칸 안에서 혼자 울다가
겨우 눈 붓기만 가라앉히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나간 적이 많아요.”
“화장실 칸이, 제 마음을 숨길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았어요.”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누구랑 이야기만 해도 금방 폭발할 것 같았어요.”
경희가 세탁 의자 옆에 조용히 다가가 다행차를 건넸다.
“입 한번 헹구실래유? 여긴 그런 감정 다 받아유.”
여자가 한 번, 슬쩍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준호가 조심스럽게 나무통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오늘 감정은 내가 먼저 받을게요.”
이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두 발을 빨래통 안에 넣었다.
준호가 천천히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치 감정의 벽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처럼.
“솔직히 말하면…
오늘도 화장실에서 한 번 울고 다시 일할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그전에 꼭- 한 번은 누군가한테 말해보고 싶었어요.”
이류가 무심히 물었다.
“오늘 가장 두드러졌던 감정은, 뭐였죠?”
여자는 한참,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서운함, 질투,
내가 너무 작아 보인다는… 미움.”
“그러니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괜찮은 나’랑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동기 발표 자료에, 제가 밤새 만든 슬라이드만 쏙 빠져 있었거든요. 새벽까지 같이 있던 팀장님은, 모르는 척 그냥 웃고 있었고요.”
“좋아요. 이제 그 말들을 한 번씩 마음속에서 다시 부르면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 내쉬어 보세요.
말이 물 위로 떠오르듯이 가슴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고 상상하면서요.”
물의 표면이 서서히 탁해졌다. 감정 빨래통 속에서 포근하면서도 어딘가 축축한 회색빛 잔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단어들이 입 밖으로 떨어지는 순간, 통 안에서 막 떠돌던 회색빛이 방향을 가진 물결처럼 한 번 흔들렸다. 이름이 붙은 감정은 더 이상 정체 모를 괴물이 아니었다.
준호의 엄지와 검지가 저릿저릿 얼얼했다. 여자의 감정이 자기 손을 타고 스며드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순간 준호의 머릿속엔 얼마 전 자신의 기억이 겹쳐 떠올랐다.
“괜히 나만 뒤에 처진 것 같고,
제자리에 있는데 혼자만 온통 거꾸로 도는 느낌.”
이류가 무심히 옆에서 목소리를 더했다.
“그 감정, 지금 여기에 다 쏟아내셔도 돼요.
누가 뭐라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갖고 있는 감정일 뿐이에요.”
여자의 손끝에 작은 진동이 올라오며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경희는 그런 여자의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몸에서 긴장이 덕지덕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속으로 짧게 ‘오늘은 너무 깊이 스며들지 말자’ 다짐했다.
이류는 손으로 세탁통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감정이 한 겹 한 겹 빠져나가도록 이끌었다. 통 안 물이 조금씩 맑아졌다. 핑크빛 머리끈도 살짝 밝아진 느낌이다. 여자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덜 무거워요.
고맙습니다…
사실 누구한테도 이런 얘길 못했는데, 여기선 괜찮네요.”
준호는 그녀의 몸에서 천천히 부정적인 감정을 떼어내듯 손을 뗐다. 그러면서도 어디 한구석에 얼얼한 진동이 살짝 남아 있는 듯했다. ‘이게, 내가 감정 필터란 증거인가…’
‘근데 가끔은,
이 필터도 교체해 줄 곳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일어서며 잠시 머뭇거렸다. 흩어지고 풀어졌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매만지더니 분홍 머리끈을 다시 손목에 걸고 깔끔하게 올림머리 만들었다. 회사에선 언제나 최대한 단정하고 괜찮아 보이는 모습으로 머리를 묶어 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흩어진 머리카락을 여자가 조심스레 다시 묶을 때, 이류는 무심코 자기 오른손 둘째 손가락의 낡은 반지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 할머니가 떠나던 날,
“너도 언젠간, 니 방식대로 마음을 묶어줄 수 있을 거야.”라며 끼워주던 반지였다.
그 약속이 가끔은 벅찬 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여자 손님의 분홍 머리끈이 그때의 반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예전에는 진짜 이 조그만 머리끈 하나도 왜 이렇게 무거웠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오늘은, 음 그냥, 이렇게 머리 대충 틀어 올린 내 모습도 나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녀는 세탁소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조용히 쳐다봤다. 표정은 여전히 어색하고 뭔가 조심스러웠지만, 눈동자 어딘가에서 반짝-, 미세한 생명력이 빛났다.
그녀는 오늘 처음,
‘남들이 바라보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해도 괜찮다는 걸 아주아주 조금, 믿어보기로 했다.
세탁소 문을 나서기 전, 그녀는 한 번 숨 크게 들이쉬고… 그동안 수~없이 망설이다가 못 보냈던 그 톡! 메시지창을 다시 열었다가… 가볍게 그냥 에이~ 하고 폰을 주머니에 휙 넣으면서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진짜, 오늘보다는 조금 더 덤덤하고 솔직해지면
그때는 진짜 하고 싶은 말, 꼭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조용히 골목을 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림머리에 있던 분홍 머리끈이 살며시 흔들렸다. 그 움직임만큼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집 문 앞에 서면 오늘은 이 머리끈부터 먼저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만큼은, 화장실 거울을 볼 때 아까 세탁소 유리문에 비쳤던 얼굴을 한 번쯤 떠올려 보게 될지도 모른다.
경희는 툭-, 작은 메모를 허공에 붙였다.
> 오늘 감정은 밝은 색으로 돌아옴.
> 그래도 내 손끝은 시리다.
지훈은 밖으로 나서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별 탈 없이 끝나서 다행이야.
그런데 이 감정이 계속 쌓인다면…
우리 중 누군가, 조금씩 더 무거워지는 거 아닐까?’
‘손님들 감정은 이렇게 잘 씻어주면서,
우리는… 누가 씻어줄까.’
세탁통 물은 매번 비워지는데, 정작 우리 안 어딘가는 조금씩 더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류는 그런 세 사람을 잠깐, 묵묵히 바라봤다.
“잘했어.” 이류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준호 씨 감정과 다른 이의 감정은 꼭 구분해야 해.
너무 오랫동안 잡고 있으면 안 돼-”
준호와 경희, 지훈은 가만히 자신의 숨을 내쉬었다.
세탁통 밑바닥, 오늘 하나의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아주 얇은 파랑 빛 선이 남았다.
그리고, 파자루니스 경계,
서라울 도시 골목에서 여전히 다음 감정의 흐름이
이 작은 세탁소 문을 향해 조용히 모여들고 있었다.
요즘 당신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있는 모습과,
지금 실제로 하루를 버티고 있는 모습 사이에는
얼마나 간격이 있나요?
자기의 모습을 한 줄로 적어본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신가요?
종이나 폰 메모장에,
① ‘지금의 나’를 떠올렸을 때 먼저 생각나는 말 한 줄과
② 그 옆에 “그래도 여기까지 온 ○○야, 수고했다.”
라는 문장을 같이 적어 주세요.
오늘만큼은
①의 문장을 고치지 말고,
②의 문장을 조용히 한 번 읽어 주는 것까지만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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