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비밀
‘시간이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마음을 힘들게 할 때,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흔히 쓰는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괜찮아지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단순한 위로의 말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괜찮아졌을까? 우리의 뇌는 이미 벌어진 사실을 어떻게 해결한 걸까? 우리의 마음을 결정하는 뇌에는 정말로 시간이 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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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힘든 마음을 뇌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뇌의 기억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은 경험은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은 사건과 같기 때문이다. 벌어지지 않은 사건에는 감정 역시 가질 수 없다.
기억은 유지 시간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감각 기억, 짧은 시간 동안 정보를 기억하는 단기 기억, 오랫동안 경험하고 학습한 일을 기억하는 장기 기억이다.
감각 기억은 감각 기관을 통해 입력된 자극을 정보 처리를 위해 매우 짧은 시간(1~4초) 동안 기억한다. 영상 기억, 잔향 기억, 촉각 기억이 있다. 저장 시간이 매우 짧아 단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는 감각 기억은 순식간에 휘발되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단기 기억은 몇 초에서 몇 분 사이 동안 직전의 경험을 기억한다. 장기 기억에 비해 용량이 적고 불안전한 특징이 있다. 조지 아미티지 밀러는 벨 연구소에서 실험을 통해 단기 기억이 처리할 수 있는 항목 수는 7±2 정도인 것을 확인했다.
장기 기억은 감각 기억과 단기 기억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오랫동안 보전할 수 있다. 경험한 것을 수개월에서 길게는 평생 의식 속에 유지하며, 쉽게 기억해 내지 못하는 정보는 장기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장기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지만 찾아내는 것과 출력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방식에 따라 명시적 기억과 암묵적 기억으로 구분된다. 명시적 기억에는 다시 의미 기억(경험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과 일화 기억(시간적 공간적 흐름에 따라 경험을 기억)이 있고, 암묵적 기억에는 절차 기억(따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수행되는 작업)이 있다. 우리의 오래된 감정을 저장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기억은 모두 장기 기억이다.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부위는 변연계(limbic system)이다. 변연계는 해마(hippocampus), 편도체(amygdala)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마
대뇌변연계의 양쪽 측두엽에 위치한 너비 1cm, 길이 5cm 정도의 기다란 구조이다. 장기 기억과 공간 개념, 감정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좌측 해마는 주로 최근의 일을 기억하고, 우측 해마는 태어난 이후의 모든 일을 기억한다. 뇌로 들어온 감각 정보를 해마가 단기간 저장하고 있다가 대뇌피질로 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거나 삭제한다. 따라서, 해마가 손상되면 새로운 정보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해마에서 대뇌피질로의 정보 이동은 주로 밤에 일어나며, 밤에 숙면을 취하면 기억 능률이 올라간다. 과음을 했을 때 필름이 끊기는 이유는 알코올이 해마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편도체
변연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편도체는 사람의 감정 변화에 반응하는 부위이다. 편도체의 감정 중추는 기억 중추인 해마와 바로 붙어 있어 기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감정과 연결된 정보는 장기 기억에 더 잘 저장되는 식이다. 감정에 따라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이것이 해마의 활성도를 증가시켜 더 자세하고 강력한 기억을 형성한다. 정서적인 각성을 일으키는 놀라운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섬광 기억(flashbulb memory)이라고 하는데, 이 섬광 기억은 세부적인 내용까지 생생하게 사진처럼 기억하며 수십 년이 지나도 망각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감정에 부합하는 사건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에 있을 때 부정적 사건을 경험하면 그 사건을, 긍정적인 감정의 상태에 있을 때 긍정적 사건을 경험하면 그 사건을 각각 잘 기억하게 된다. 또한, 어떤 감정 상태에 있을 때 그 감정에 부합하는 과거의 일을 더 잘 떠올리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라면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이 잘 떠오르고, 긍정적인 감정 상태라면 과거의 긍정적인 기억이 잘 떠오르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과 감정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와 인지 및 학습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편도체
사람의 감정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부위는 편도체이다. 감정 변화의 첫 관문으로 편도체가 먼저 활성화되고 나면, 이후 감정 반응의 마지막 단계로 호르몬이 분비되어 표정 및 행동에 변화가 발생한다. 편도체가 발달할수록 감정이 풍부해지며, 편도체가 손상되면 공포감을 잘 느끼지 않게 된다.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전전두피질은 편도체가 반응한 감정들을 조절한다. 긍정적 감정 상태에 있을 때는 왼쪽 전전두피질이 활발해지고, 부정적 감정 상태에 있을 때는 오른쪽 전전두피질이 활발해진다고 한다. 간혹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에게서 자살 충동이 생기는 이유는 전전두피질과 편도체의 연결망이 약해져 두 기관의 상호작용에 오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감정을 표현하면 편도체와 오른쪽 전전두피질이 서로 상쇄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데, 슬픔이나 분노를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활동이 줄어들고 오른쪽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돼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뇌가 벌어진 사건을 저장할 때 당시의 감정에 긴밀하게 영향을 받는 만큼, 우리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켰던 사건은 부정적인 감정 상태에 있을 때 더 잘 떠올라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심지어 마음의 상처가 깊은 경우, 과거의 긍정적인 사건마저 ‘그땐 그랬는데….’라는 생각을 통해 현재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질병 수준으로 힘든 마음만 아니라면,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힘든 마음은 괜찮아지기 마련이다.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당연히 마음이 괜찮아지겠지만, 해결되지 않은 사건에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뇌에서 일어나는 망각과 편집에 있다.
큰 사건으로 행복도가 크게 변했을지라도 3~6개월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행복도로 돌아온다는 행복에 관한 소냐 류보머스키(2007)의 연구 결과는 유명하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은 행복도가 크게 올랐고,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은 행복도가 크게 낮아졌으나, 시간이 지나자 둘의 행복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극적인 감정을 잊는 뇌의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콜로라도볼더대 앤 피어스와 조 도날드손 교수 연구팀은 2024년, 연인과 헤어졌을 때의 슬픔을 잊는 뇌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프레리 들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들쥐는 짝과 한 공간에 있을 때 도파민이 폭발적으로 분비되었다. 도파민은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불리며 성취감, 동기부여, 쾌락, 보상감 등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짝과 일정 시간 분리되면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았으며, 분리되었던 짝과 다시 만났을 때 서로 붙어 있으려는 행동도 감소했다. 이는 헤어진 짝을 잊고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뇌가 일종의 ‘리셋 작용’을 한 것이다.
화가 나거나 슬플 때 잠을 자면 부정적인 감정이 완화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22년, 스위스 베른대 의생명연구학부와 이탈리아 기술연구원 공동연구팀은 잠을 자는 동안 뇌가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분류해 긍정적인 감정은 저장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약화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수면은 크게 렘수면과 비렘수면으로 나뉘는데, 렘수면 중에는 감정적 기억이 전전두엽 피질에서 통합된다. 수면 중 쥐의 뇌 활동을 기록한 결과, 렘수면 동안 감정 신호가 뇌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되지 못하고 차단되었으며, 특히 부정적인 감정의 신호일수록 차단되는 경향이 뚜렷했다. 이는 불안장애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방지하는 뇌의 효과적인 분류 과정이다.
기억의 망각을 논할 때 가장 유명한 것으로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이라는 것이 있다. 1885년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가 발표한 논문에 따른 것으로, 학습 후 초반에 망각이 급격히 일어나며 시간이 지나면 망각이 천천히 진행되는 것을 나타낸 곡선이다. 곡선에 따르면 학습 후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어 하루가 지나면 70% 이상이 망각되기 때문에 학습 후 여러 번 복습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 번 반복을 통해 장기 기억에 저장했는데도 망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망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간섭설이다. 장기 기억에 저장된 정보 다음에 저장되는 정보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정보 때문에 기억하고자 하는 정보의 보전이 간섭받는 것이다. 이러한 간섭은 기억의 인출에 영향을 준다. 특정 정보가 입 안에서 맴돌며 잘 생각나지 않는 ‘설단 현상(tip-of-the tongue)’이 인출 실패의 대표적인 예이다. 성인이 되면서 아동기(4세 이전)의 기억이 상실되는 현상도 인출 실패가 원인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보상 기전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지우는 것이다. 불안과 같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정서는 기억의 인출을 방해하며, 특히 불쾌함을 유발하는 기억은 저장 및 인출이 억압된다.
중요한 점은, 망각을 극복하고 저장된 기억이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2003년 로프터스와 팔머의 차 사고 기억 실험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교통사고 영상을 봤더라도 ‘차가 접촉할 때 차의 속도는 얼마였나?’라고 물었을 때보다 ‘차가 충돌할 때 차의 속도는 얼마였나’라고 물으면 영상에서 본 차의 속도를 더 빠르게 이야기했다. 질문에서 사용된 단어가 사람들의 기억을 왜곡한 것이다. 즉, 기억은 위조되기 쉽다. 한 예로,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중에 노래한 사람의 감동이 이전에 노래한 사람보다 오래 남아 경연에서 유리할 때가 있다. 이는 심리학에서 ‘절정과 종결의 법칙’으로 부르는 현상으로, 기억이 과거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절정 또는 종결 단계에서 본인의 감정에 따라 기억의 강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음식이 형편없었지만, 종업원이 친절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면 그 식당의 음식 역시 훌륭했다고 기억하는 것도 이 법칙의 예 중 하나이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 또한 학기가 끝났을 때 성장한 반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서 1년간 힘들었던 감정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즐거운 한 해였다고 기억하며 다음 해에 또 담임을 신청하는 우(?)를 범한 적이 많다.
기억이 재구성되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실제로 경험했다고 착각하는 거짓 기억이 생기는 일도 있다. 어린 아동일수록 거짓 기억에 취약하며, 어떤 가상의 사건이 논리적으로 경험할 만한 사건이라면 거짓 기억이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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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뇌는 컴퓨터의 하드웨어같이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는 기관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망각하기도 하고, 편집하기도 하며, 편집한 기억을 다른 기억보다 더 강하게 저장하기도 한다. 이런 뇌의 융통성(?)이 시간을 약이 되게 한다.
잘 자고 잘 먹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은 상당 부분 약화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이때, 차분하게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불쾌한 기억이 아직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사건을 잊을 수도 있다. 만약 장기 기억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받아들이는 태도, 인식, 감정에 의해 사건은 재구성되어 추억으로 미화되거나 교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마치 평생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가 나를 괴롭게 하고 있더라도 아직은 좌절하지 말자. 뇌는 곧 지금의 감정에 무뎌질 테고, 기억과 사건은 망각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거나 교훈, 추억 같은 것으로 재탄생할 테니까.
다만, 계속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며 이 사건이 평생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진짜로 그 사건은 평생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되어 더욱 괴롭고 힘든 기억으로 영원히 각인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믿으며 긍정적이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면 편도체와 오른쪽 전전두피질이 서로 상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하니, 정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힘든 마음을 어디든 툭 털어놓은 후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믿어도 좋다. 아무튼 시간이 약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우리 뇌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문제와 감정은 분명히 괜찮아진다. 뇌는 시간이 약이다. 그러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