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여름의 국어시간, 여행지 소개문을 만들기 위해 두 명씩 팀을 꾸리는 중이었다. 모두 준우를 외면하는 가운데 선뜻 같이 하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준우야, 나랑 해도 괜찮지? 흔들리는 준우의 눈동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성이는한 마디 덧붙이며준우를 데리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어색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친구의 상황을 헤아리는 마음이 낯설게 느껴진 까닭이다.한성이의 마음,먼저 표현하기는어렵지만 누구나 남들에게 받고 싶어 하는 마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속 '굳이'라는 단단한 벽에 가로막혀 멈칫했던마음. 우연히 마주친 그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교실에는 또래에 비해 '느린' 아이들이 있다. 내가 만나온 느린 아이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였다.(기우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느리다'라는 표현은 성급한 낙인을 막기 위한 일종의 완곡어이므로 지나치게 남용해서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첫 번째는 행동이 단순히 느린 아이들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거나 혹은 너무 없어서 말이나 행동이 1.5배에서 2배 정도 굼뜨게 표현되는 아이들인데, 사실 동작만 느릴 뿐 학습이나 친구관계에 큰 지장은 없다.
두 번째는 일과 중에 특수반에 다녀오는 아이들이다. 공식적으로 특수교육대상자인 아이들이라 원 교실에서 생활할 때 조금 느리거나 실수해도 친구들이 쉽게 이해하고 부족한 부분도 성심껏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첫 번째에도두 번째에도 속하지 않는 느린 아이들이다. 교사로서 가장 고민이 많이 되는 부류의 아이들인데, 대체로 교과 학습을 따라가기 매우 어려워하고 인간관계도 서툰 편이라 친구들에게 은근한 기피와무시를 받는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아이들이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문제가 없고 눈치껏 학교생활도 곧잘 해내기에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나 배려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애매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여집합도 교집합도 아닌 준우가 그중 한 명이였다.
준우는 특히 읽고 쓰기와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려워했다. 예를 들면, '오늘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대답은 할 수 있었지만, 글로 풀어내는 것을 못했다. 만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담임교사보다 지난 5년 간 오며 가며 함께 지내온 아이들이 준우의 상황을 훨씬 잘 꿰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성이는, 모두가 함께하기 꺼려하는 준우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한성이의 마음과 두 아이가 함께 하는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아이들은 팀별로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정한 후 태블릿을 이용해 자료 조사를 했다. 여행이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는지 모두 조그만 머리를 맞대고 열심이었다. 삼십 분쯤 지난 후 교실을 둘러보며 진행 상황을 살폈다. 다른 팀보다는 한성이와 준우네를 보려는 이유였는데, 아주 작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준우는 무언가 열심히 적는 한성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 하기 어려워할 것이 뻔했다. 준우를 다그쳤다.
"준우야, 네가 맡은 일 있지?"
준우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오늘은 두 명이 같이 하는 거니까 준우 너도 반은 만들어야 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온 대답은 준우가 아닌 한성이의 것이었다.
"아, 선생님! 준우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찾았어요.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거 하라고 얘기했어요."
준우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듯 말하는 한성이의 모습이 또 한 번 낯설었다.분명 한성이가 전부 도맡아 하고 있을 터였다.잘 해내고 싶은 욕구가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은오히려 선생님께 일러 준우를 더 열심히 하게끔 재촉했을 텐데,한성이는 준우가 혹시라도 혼이 날까 봐 보호해주고 있었다.준우의 어려움을 이해한 것이다.
갑자기 슈퍼맨이 떠올랐다. 국어 과제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악당이라면 한성이는 든든한 어깨 뒤에 평범한 사람이 숨을 수 있게 지켜주는 슈퍼맨이었다. 걱정 마,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같이 하면 돼, 라고 말하는 슈퍼맨 말이다.
완성된 여행지 안내문을 발표하는 시간이 왔다. 팀별로 조사한여행지의 글과 사진을 교실 화면에 띄워놓고 전체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내용을 반반씩 나누든, 9대 1로 나누든상관없지만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꼭 한 번씩은 말하기로 약속했다. 많은 팀에서발표를 좀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내용을 몰아줬다. 그런데 한성이와 준우는 아니었다. 의외로, 딱 반반으로 나누어왔다.
"저희는 영국의 여행지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한성이가 낭랑한 목소리가 발표의 포문을 열었다. 다음 장은 준우의 차례였다. 준우는 5학년임에도 한글을 더듬더듬 읽었고, 목소리도 워낙 작은 편이라 발표를 듣는 모든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곳은 빅... 빅.."
역시나 난관이었다. 방과 후에 아무리 남아서 공부해도 글 읽기가 어려운 준우였다.
"..이곳은 빅 벤입니다"
그때 한성이가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우가 따라 말할 수 있도록 옆에서 먼저 읽어주고 있었다. 친구가 잘 못 읽는다고 해서 핀잔을 주거나, 자신이 대신하려 하지 않고 준우가 잘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이곳은 빅.. 벤입니다"
한성이의 말을 따라 준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다음 장도, 그 다다음 장도 한성이는 낮게 읊조리며 인내심을 갖고 준우를 기다렸다. 두 아이는아주 공평하게 발표를 마쳤다.
더 이상 한성이의 마음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행동도, 칭찬이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도 아닌, 그저 함께 해보자는 의지와 격려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배려'라고 불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성이는 준우의 슈퍼맨이었다.
불편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상이다. 어떤 불가피한 이유도, 다른 이의 부득이한 사정도 '나'에게 결코 불편함과 답답함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하철에서 몸이 불편한 어르신이 내 앞에 서있을 때,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배려하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천천히 내릴 때, 별로 바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직장에서 동료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굳이 내가 왜'라는 벽을 세워 모르는 척을 했다.
왜 그랬을까.편안한 상황을 포기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일종의 손해처럼 느껴져서였을까, 배려하는 모습이 가식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아님 미련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적어도 한 개의 이유는 있었을 테다. 그래 서였나보다.이미현실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버려서열두 살 아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신경쓴모습이 그렇게도 낯설었나 보다.
배려의 마음이 꺾여버린 숱한 이유들을 이해하기에 함부로 권할 수 없음을 안다.팍팍한 현실에 누군가의 어려움까지 곱게 볼여력이 없고,배려를 권리처럼 이용하는 소수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다는 것도 이해한다. 어쩌면, 이기주의 풍토가 낳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개인주의 현상이라 소시민은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성숙하고 고마운 마음들을 허공에 분해시킬 수 없다는 욕심이 든다. 누군가에게 숨 쉴 구멍이 되어주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불어넣는 이 마음을 우습게도, 미련하게도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자로 배려는 짝 '배'자에 생각할 '려'자를 쓴다. 짝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저 학창 시절, 짝꿍의 얼굴을 살피고 말 한마디 걸어주듯, 지우개를 빌려주듯, 교과서를 같이 보듯 그 정도의 마음을 내어준다면 좀 더 살만 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품어본다.
항상 기억하고 싶다. 준우는 우리의 부모님, 친구, 연인, 그리고 나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