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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읽을 줄 모르는데 그냥 해봐도 되나요?

어른들이 잃어버린 질문 : 용기

by 박단단


초등학교 2학년 때 재즈댄스를 배운 적이 있다. 한창 TV 속 아이돌과 연예인을 동경할 때였다. 꿈에 그리던 우상들을 닮으려면 춤을 찰 춰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엄마한테 댄스학원에 보내달라고 생떼를 썼다. 상당히 귀찮게 졸라댄 모양이다. 엄마는 결국 일주일에 한 번,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서예반 옆 교실에서 열리는 재즈댄스반을 등록해 주셨다. 사실 내가 원한 건 방송댄스였던 것 같지만, 재즈댄스든 벨리댄스든 상관없었다. '댄스'를 배우는 내가 된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2학년 1반 박단단이 아니라, 2학년 1반에 박단단이라는 애가 있는데... 걔 댄스 배운대! 가 중요한 것이었다. 학교 장기자랑 무대에서 춤을 추는 꿈은 달콤했다. 드디어 다가온 수업 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딱 두 번을 나가고 그만뒀다.


푸른 꿈에 부풀어있던 나를 무릎 꿇린 건 '웨이브'였다. 양팔을 뻗고 관절단위로 하나씩 접어 가다 한 번에 빠르게 꾸물거리는 동작이었다. 선생님은 거대한 통거울 앞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웨이브를 시켰다. 물론 선생님의 의도는 어린아이들을 창피 주고자 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춤추러 온 애가 부끄럼을 탄다는 것도 좀 웃기다. 나는 양팔을 뻗고 손목, 팔꿈치 순서대로 야무지게 접어 춤처럼 만드려고 노력했..으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뻣뻣함 그 자체인 로봇이었다. 삐그덕 삐그덕. 후한 마음으로 봐줘도 재능이 없었다. 선생님은 내 팔 관절 하나하나를 직접 접어가며 기름칠을 해주셨다. 연습하면 잘 될 거라는 진심 어린 응원의 말과 함께. 하지만 이미 나는 아이돌의 멋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로봇을 목격한 뒤였다. 이게.. 하면 될까? 나도 할 수 있을까? 아홉 살의 나는 선을 그어버렸다. 이 길은 아니라고. 댄스는 내 인생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아마 평생토록.


그 후로도 나는 계속 선을 그으며 살았다. 물론 짝꿍과 책상 한가운데 삐뚤빼뚤한 선을 긋고 '넘어오면 죽어!'를 외치면서 투닥대는 일도 잘했지만, 내 선긋기의 진가는 할 일을 둘로 나누는 것에서 빛을 발했다. 잘할 수 있는 일과 잘 못하는 일을 기가 막히게 구분해 냈다. 될 성 부른 떡잎만 선택해서 만끽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고 여러 선택지 중에 좋은 결말이 예상되는 일만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재즈댄스반에서 겪었던 '불쾌함'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의 크기는 혹시나 선을 넘었을 때 느낄 불쾌함의 크기보다는 늘 작았다.


선 긋는 습관은 지독했다. 우리 엄마는 주로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주셨기에 일평생 나에게 미역국은 딱 한 종류였다. 씹을수록 감칠맛이 느껴지는 소고기가 없으면 그게 미역국인가. 가끔 급식에 바닷바람 냄새를 풍기는 황태 미역국이나 전복 미역국이 나와도 입에 잘 대지 않았다. 맛있을지 아닐지 모르니까. 괜히 먹어봤다가 비위가 상하기라도 한다면 곤란하지 않나. 옷 입는 일도 그랬다. 평소에 중청색의 청바지만 입었다면, 엄마가 아무리 상큼한 '연청'과 멋들어진 '흑청'을 사줘도 잘 입지 않았다(엄마의 마음을 생각해 잘 입는 척만 했다). 친구들의 반응이 괜찮을지 별로일지 알 수 없으니까. 괜히 입고 학교에 갔다가 놀림받으면 내 기분만 나쁘지 않은가. 굳이 불확실한 일에 도전할 이유가 없었다. 실패하면 불쾌할 테니까.


내 인생은 OX퀴즈판 같았다. 경험을 기준 삼아 O와 X로 나누고 O로 할당된 일만 골라하는 게 현명한 태도라 믿었다. 몸도 마음도 편하고, 변수도 없고, 크게 불쾌하지 않 삶.


그렇게 그어둔 선 위로는 두꺼운 벽이 생겼다. 그리고 어느새 그 벽 위엔 돌돌 말린 철조망까지 얹혀 있었다.




"선생님, 저 해봐도 되나요?"


"할 수 있겠어? 혹시 해본 적 있어?"


"아뇨. 안 해봤는데 해보고 싶어서요. 그냥 해봐도 돼요?"



한평생 선긋기를 하며 살아온 교사는 어느 해, 5학년 교실에서 유달리 고집스럽고 자기애가 강한 열두 살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이제 막 사춘기 눈빛을 장착할락 말락 하는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일 년을 꾸려가야 하는 숙명 앞에서는 어떤 성향의 아이들을 만나느냐는 늘 중요한 법이다. 매해가 너무 다른데, 한 해가 설렁탕이면 다른 해는 마라탕이다. 예를 들어, 같은 6학년을 맡아도 돼지띠, 쥐띠, 소띠, 호랑이띠 아이들(편의상 띠로 구별했다)이 천차만별이랄까. 어떤 해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들이 많아 일 년 내내 고요하게 지낼 때가 있는가 하면, 텐션이 천장을 뚫어버리는 해도 있다.


뭐, 이러면 이래서 좋고 저러면 저래서 좋고. 반 분위기는 일장일단이 있으니 크게 개의치 않지만 유달리 그 해 5학년 아이들은 고집이 세고, 겁이 없고, 거침이 없었다. 특히 '뭔가 해보는 것'에 대해 주저함이 없었다. 선생님은 제 자리에서 빙빙 도는 회전목마인데, 이 아이들은 냅다 하늘로 뛰어버리는 번지점프였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전국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타악 합주부가 있었다. 보통 서양악기를 중심으로 오케스트라를 편성하거나 국악기를 중심으로 사물놀이부나 난타부 정도를 운영하는데 우리 합주부는 전체 타악기로만 구성된 독특한 합주부였다.(학교의 자부심인 이 합주부를 원활히 운영하는 것이 바로 내 업무였다!) 그런데 학교의 아낌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신입단원 모집이 무척 까다로웠다. 생각보다 연습량도 많았고, 악기 자체도 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악보를 보고 계이름을 술술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점도 또 하나의 장벽이었다.


그 해 합주부를 들어오겠다는 아이들이 없어서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아무한테나 합주부에 들어오라고 추천할 수도 없는 게, 최종적으로 무대에 서려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무척 중요했기 때문이다. 추가모집까지 해보고 정 안되면 없는 대로 꾸려가야겠다 생각하던 순간, 윤채가 등장했다. 동그란 안경이 트레이드마크인 윤채는 숱 많은 까만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마라탕 같은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활기차고 살스러운 아이였는데, 평소와 달리 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아무튼 음악보다는 체육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선생님, 그 합주부요.. 추가모집하길래요. 저 신청해도 돼요?"


"어, 좋지! 윤채 악보 볼 줄 알지?"


"저.. 아니요.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아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제가 피아노학원을 안 다녀봐서요"


".. 그래? 부모님한테도 하겠다고 말씀드렸어?"


"네, 근데 엄마가 저 악보도 잘 모르는데 가서 할 수 있겠냐고.. 일단 선생님께 한번 여쭤보라셔서요"


솔직히 말하면, 윤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감했다. 합주부에서는 소악기뿐만 아니라 음계가 있는 타악기도 많이 다뤘다. 기본적인 박자, 계이름은 볼 줄 알아야 수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강사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음악을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뒤처지면 어떡하지? 중간에 안 하겠다고 포기하면 곤란한데. 내 고질적인 선긋기 습관이 또 발동하려 했다. 윤채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나는 윤채의 선을 대신 그어주려 했다.


"윤채야, 저기.."


".. 그런데 배우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한번 해보고 싶어요. 오늘 집 가서 오디션 영상 보내도 되죠?"


윤채의 말이 내 선보다 먼저 허공에 그어졌다. 오디션은 각자 자신 있는 악기로 자유곡을 연주한 영상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보통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취미로 하는 악기로 연주하는 영상을 찍어 보내는데, 윤채는 음악 교과서 '나무의 노래'를 리코더로 연주하는 장면을 찍어 보냈다. 배번호까지 붙이고 한 음 한 음 정성스럽게 연주하는 윤채의 모습이 꽤나 진지했다. 신청인원이 적었던 탓에 윤채는 큰 경쟁 없이 합주부 단원으로 뽑혔다. 무척 신나 하던 윤채는 학원 시간도 겹치지 않게 부모님이 바꿔주셨다고 자랑하며 다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윤채에게 선을 그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첫 합주부 연습이 끝난 다음 날, 윤채를 불러 물었다.


"윤채야, 어제 어땠어?"


"재밌었어요!"


"그래? 어렵진 않았어?"


"진짜 어려웠어요. 다른 애들은 빨리 잘 따라 하던데요. 선생님이 저는 점심시간에 와서도 연습해야 한대요."


"그래도.. 계속할 수 있겠어?"


"네! 잘 안되는데 그냥 해보려고요. 악기연주 같은 거 진짜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윤채는 씩씩했다. 윤채에게 남들이 잘하는 것은 상관없는 일처럼 보였다. 몇 번하고 관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윤채를 기다렸지만, 계절이 지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한 번은 강사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내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 윤채 어때요? 잘 따라오나요?"


"윤채가 확실히 배우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합주 자체도 잘 따라오는 편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가장 재밌게 해요! 몸도 막 흔들면서요"


그해 10월, 지역 연주회의 무대에는 여느 때처럼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빳빳이 다려진 단복을 입은, 손에는 악기를 들고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표정을 짓던 윤채가 서있었다. 스무 명의 아이들과 함께 박자를 맞추며 악기를 두드리는 5분. 윤채는 자신의 자리에서 당당히 소리를 냈다. 윤채의 진지한 눈빛과 몰입하는 모습을 나는 한동안 바라봤다.


"선생님, 엄청 떨렸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내년에는 언니오빠들 하는 다른 악기 도전 해보려고요!"


무대가 끝나고 해맑은 웃음을 짓던 윤채의 모습이 돌처럼 날아와 내 마음에 물수제비 같은 파장을 남겼다.


나는 때가 되면 밥을 먹듯 선긋기를 해온 사람이었다. 시도와 변화보다는 안정과 유지가 좀 더 현명하다고 믿었는데, 윤채의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또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보를 볼 줄 모르지만 꼭 해보고 싶다던 당당한 목소리,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했던 리코더 연주, 빠짐없이 참여했던 합주부 연습, 윤채의 마음은 '악보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훨씬 잘하는 모습에 주저앉지도 않았다.


그저 하고 싶으면, 해보는 것. 그게 전부였다.




몇 해 전, 친한 친구가 발레가 너무 재밌다며 함께 해보자고 했을 때, 재즈댄스로 그어진 선을 넘지 못하고 포기한 적이 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잘하지 못할 것 같아서. 지레 포기해 버렸다. 시작하기도 전에 스스로 닫아버린 문이었다.


그런데 남들이 뭐라 하든, 능력이 얼마나 되든 그저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합주부에 들어갔던 윤채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그어왔던 선은 어쩌면 핑계가 아니었을까. 아무도 보지 않는데 혼자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눈밑까지 끌어올린 모양새랄까.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못했으니 앞으로도 못할 거야'라는 생각들로 스스로를 가두었던 시간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텔레스크린처럼 스스로를 감시하며 과거의 한순간으로 미래까지 규정해 버렸던 순간들이 문득 아쉽게 느껴진다.


사실 마음속에 품고 사는 일들이 많다. 발레도, 한국무용도, KPOP댄스도 한 번쯤 배우고 싶다. 클라이밍이나 테니스, 통기타와 비올라, 트럼펫 연주도 언젠가 해보고 싶다. 제는 조금씩 그 선을 허물어볼까 한다. 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고민 없이 해볼 생각이다. 뒷북도 아니고, 앞북치며 포기해 버리는 삶이 얼마나 아쉬운가. 실패의 불쾌함을 상상하며 주저하기보다는, 한 번쯤 '그냥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몸을 싣고 떠나보는 게 더 가치 있을지 모른다. 선을 긋는 일은 인생에 주어진 다채로운 색깔들을 온통 까맣게 칠해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칭찬받지 못했으면 어떻고 남들이 보기에 좀 우스꽝스러우면 어떤가. 해보고 싶다는데! 나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내 인생의 한쪽이다. 꼬부랑글씨로 한쪽으로 쓰든, 형광펜으로 한쪽을 쓰든 아무 문제없다.


혹시 나처럼 선긋기를 열정적으로 하며 살고 있을 세상의 동료분들이 있다면, 윤채의 질문을 선물하고 싶다.


'악보 볼 줄 모르는데 그냥 해봐도 돼요?'


아마 윤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그냥 해봐도 된다고. 명 재미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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