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잃어버린 질문 : 의지
한 번쯤은 이런 카톡 메시지를 받아본 적 있을 것이다.
<OO님이 초대한 '재미로 알아보는 유형 테스트' 참여하기!>
최근 몇 년간 온라인에서 가장 유행했던 콘텐츠를 꼽자면 단연 '나를 알아보는 각종 테스트 시리즈'다. MBTI와 연애 유형 검사로 불붙은 이 열풍은 기업 마케팅의 니즈까지 충족시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테스트를 쏟아냈다. 사람들은 결과를 캡처해 공유했고, 내 결과와 남의 결과를 비교하며 적막하던 단톡방에서 모처럼 수다꽃을 피웠다. 그때 내가 얻은 '칭호'들을 잠깐 소개해보자면 INFJ, 안정형, 유유자적 카톡러, 가장 어울리는 여행지는 싱가포르, 가지고 있는 불치병은 '팀플공포병'이었다.
아무튼, 이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MBTI를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오히려 MBTI를 모른다고 하면 괜히 뻘쭘해지는 세상. 재미든, 진심이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느슨하게 규정하는 말들로 채워진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 그런 '칭호'라는 이름표 뒤에 자신을 숨기려는 시도를 보게 된다.
얼마 전의 일이다.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연구회에서 오랜만에 오프라인 행사가 열렸다. 삼십 여 개의 크고 작은 연구회가 한자리에 모였고, 주최 측은 네트워킹을 위해 사람들을 무작위로 섞어 새로운 팀을 구성해 두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자연스레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새로운 수업을 기획해해야 하는 팀 미션을 해내야 했다.
한 시간이 지나, 발표자를 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바스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정적 속에서, 미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한 분이 입을 열었다.
"저희 그러면,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결정할까요?"
그런데,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 분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말임은 분명했다.
"저는 MBTI가 내향형이라서.. 발표는 잘 못할 것 같은데, 혹시 안 될까요?"
그 순간, 원탁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있던 팀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벙쪘다. 심지어 그럴듯하게 들릴 뻔했다. '암, 내향형이면 발표를 못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할 뻔한 찰나, 불쑥 이런 생각이 솟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핑계지?' 유형 검사 결과가 마치 '감기약을 먹어서 술은 못 마셔요' 혹은 '운전면허가 없어서 카풀은 못 해요'라는 말과 동급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다행히 뒤늦게 발표를 자원한 분이 있어 상황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이 장면은 내게 묘한 충격으로 남았다. 혹시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그렇게 변명 삼은 적은 없었을까. 입이 바싹 말랐다.
외부에서 수여받은 '칭호'가 어느새 일종의 면죄부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 말 한마디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걸까. 정말 그게 마땅한 것일까. 뭉게뭉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많은 검사들의 목적은 결국 내 안의 몇 가지 특성을 숫자로 줄 세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끝자락으로 밀려난 것들은 그냥 '덜 가진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도 되는 걸까.
그런데 얼마 전, 우리 반의 5학년 아이가 그 말이 언제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5학년 현수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이삼 년 정도 느린 아이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 분수의 곱셈을 할 때 구구단을 다시 외웠고, 다른 아이들이 A4 한 장 분량의 생각글쓰기를 할 때 현수는 간신히 한 문장을 적었다. 이제 막 고학년이 된 학기 초, 몸집이 작고 왜소한 데다 학습에도 어려움을 겪는 현수가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현수는 어지간한 일에 개의치 않는 아이였다.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다행히 당시 우리 반도 서로를 잘 챙기며 잘 어울리는 분위기라 나름대로 즐겁고 안정된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현수가 그저 학교를 즐겁고 안전하게 다니기만을 바라는 부모님 뜻에 따라 나도 공부를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때면 '이건 좀 도와줘야겠다' 싶어 국어와 수학만 복습만 챙겨주었고, 그 외의 것들은 마음 가는 대로 하게 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내가 교사로서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학교생활에 필요한 준비물을 스스로 챙겨 오는 일이었다. 이 년 후면 이 아이도 곧 중학생이 될 터였다. 공부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자신이 할 일이나 물건을 스스로 챙기는 법만큼은 꼭 배우고 가야 했다. 언제까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대신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훗날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첫 번째 단추를 함께 채워주고 싶었다.
2학기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매일 '배움 공책'을 쓰는 루틴이 있었다. 하루 동안 배운 내용이나 기억에 남는 일을 적는 일기 같은 공책이다. 공책이 없으면 친구에게 빌리거나 이면지에라도 적어서 검사를 맡고 가야 했고, 다 쓰면 스스로 새 공책을 챙겨 오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런데 현수가 공책을 다 쓴 지 이틀이 지나도록 새 공책을 가져오지 않았다. 아니,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미처 하지 못하는 듯했다.
"현수야, 공책 다 썼으면 새 걸 가져와야지. 여기 뒤표지에 쓰지 말고"
"아 맞다! 까먹었어요."
"공책 가져올 거지?"
"네, 가져올게요"
다음 날 공책 검사 시간이었다. 현수는 여전히 쓰던 공책 맨 뒷장에 이면지를 덧붙여 가져왔다.
"현수야, 공책은?"
"저.. 못 가져왔어요"
"왜 못 가져왔어?"
"집에만 가면 생각이 자꾸 안 나는지 모르겠어요. 내일 꼭 가져올게요"
그다음 날 공책 검사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과연 챙겨 왔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현수가 건넨 공책을 보니 이번에도 똑같이 쓰던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면지를 붙이지 않고, 공책 중간의 빈 공간을 모아 글을 써왔다. 이쯤 되니 나도 고민이 됐다. 사실, 교실에 남는 공책을 하나 건네줄 수도 있었고, 부모님께 연락해 '공책 좀 챙겨주세요'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수가 스스로 생각해 내고 행동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비록 자신이 없는 영역일지라도, 스스로 하려는 마음만큼은 가져야 했다.
나는 기다려야 했고 현수는 배워야 했다.
"현수야, 공책 언제 가져오려고?"
"진짜 가져오려고 했는데.. 못 가져왔어요"
"공책 챙기는 게 어렵니?"
"네. 준비물 챙기는 게 잘 안 돼요. 집에 가면 생각도 잘 안 나고.."
"그럼 4학년 때는 어떻게 했어?"
"선생님이 주실 때도 있고, 그냥 없이 할 때도 있었어요"
현수는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잠깐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선생님, 저 손바닥에 적어갈게요"
그러고서는 네임펜을 집어 들더니, 손바닥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공책'이라고 적었다. '내일은 꼭 가져올게요'라는 현수의 의지가 그 작은 손 위에 분명히 보였다. 하지만 현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도 공책은 없었다. 아침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현수는 내 눈을 피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사부작사부작 일어나더니 교탁 앞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저 못 가져왔어요"
"그래?"
"저, 혹시 포스트잇 한 장만 빌려주실 수 있나요?"
"포스트잇? 왜?"
"저 할 게 있어서요"
현수의 결연한 표정에 빌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주자, 현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현수가 들고 온 것은 매일 가지고 다니는 자기 물통이었다. 물통에는 노란색 종이가 달랑달랑 붙어 있었다. 그 위에는 큼지막하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공책 가져오기]라고 적혀있었다!
"물병 매일 닦으니까, 여기 붙여놓으면 돼요"
어떻게든 가져오겠다는 결심이 느껴졌다. 현수의 눈빛이 단단하게 빛났다.
"오, 좋은 방법인데?"
"제가 너무 잘 까먹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겠어요"
나는 직감했다. 내일은 정말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걸. 다음 날 아침, 복도 저편에서 현수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달려왔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소리쳤다.
"선생님, 저 가져왔어요!"
공책 하나를 가져오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현수가 빳빳한 새 공책을 들고 와 환하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현수는 자주 잊어버리는 아이였다. 무언가 챙기는 데 서툴렀고, 덤벙이는 성격을 타고난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는 마음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물통과 포스트잇을 써서라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신의 부족함을 그저 '부족함'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마음 말이다. 공책을 가져오라고 시킨 건 선생님인 나였지만, 공책을 가져오기 위해 애쓴 시간은 오롯이 현수의 몫이었다.
물통에 달랑거리던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이 그날따라 참 근사해 보였다.
활력보다는 무기력이, 긍정보다는 냉소가 익숙해진 세상이다. 시니컬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고,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 사소한 실수나 약점을 보완하려는 마음이 이 시대엔 어쩐지 '덧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점점 퇴색되어 간다. 그럼에도 현수 같은 아이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생(生) 앞에서 자연스레 겸손해진다.
우리는 우리를 규정하는 언어들 속에 둘러싸여 산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칭호'들이 혹시 나를 한계 안에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그 편안한 울타리 안에서 '생각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을 정당화해 온 건 아닐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우연히 본 한 가수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조금의 성장도, 발전도 없이 나이 든 내 모습을 보는 것'. 어쩌면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건 할 수 있는 일은 꾸준히 해내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가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나 자신에게,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려는 작은 의지 하나를 품을 기회를 기꺼이 허락한다면, 조금은 덜 후회할 내일이 펼쳐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