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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디 May 21. 2020

쓰리잡하면서 의과대 유학생활, 제 선택은 책임져야죠.

인터뷰 <선택의 이유> 2번째 인물_바이오 전략기획가 Min님


시간이 약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흔히 건네는 말. 영어로는 Time heals all wounds. 정말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명약일까? 여기까지 오느라 찢기고 부서져서 물에 반쯤 잠길 만큼 위태로운 종이배가 된 사람에게도...'시간이 약이다'라는 응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하루를 보내본 적이 있다. 아픔을 외면하기 위해 직무와 전혀 관련 없는 학원을 다니던 때였다. 학원은 강남역에 즐비한 고층빌딩 중 한 곳으로 10층에 위치해 있었다. 매일 퇴근을 하고 가서 학원 휴게실에 앉아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드는 풍경을 보며 저녁 수업을 기다렸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강남대로에 모든 건물마다 불빛이 하나씩 들어오는 풍경을 천천히 느끼면서. 낮이 밤이 되듯, 지금 마주해야 하는 어려움이 현실이 아니라 꿈으로 뒤바뀌길 바라면서. 그럼에도 매 초, 매 시각이 너무 선명해서 촘촘한 파편이 되어 온 몸에 박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시공간이 아득해졌다. 그 약효가 충분히 나타날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은 비가 오는 시기라고. 먹구름이 개면 맑은 하늘을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렵지만 혐오에 휩싸이지 않도록, 모든 게 불확실해도 빛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누군가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자꾸만 괴롭힌다면, 우리는 얼마나 두려움과 막막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강하게 보호할 수 있을까?


오늘은 소문으로 익히 들어온 바이오 업계 전략기획의 달인, MIN 님(가명)을 지면에 모시려고 한다. MIN 님은 호주에서 약 10년 간 지내면서 의학을 공부하고 영업과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해오다가, 한국은 재작년에 들어왔다. MIN 님을 만나 거대한 운명의 파도를 넘어온다는 게 어떤 무게감인지, 오늘에 당도한 감회는 어떤지, 길 위에서 버텨낸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시드니의 야경

단디 : 안녕하세요. 민 님! 이번 한 주는 어떠셨어요?


민 : 역시나 많은 일이 있었네요. 다 말하긴 길고… 이틀 전에 실내 암벽장에 갔어요. 같이 간 동료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데 제 쪽에서는 차가운 물만 들입다 나오더라고요. 고맙게도 그 친구가 서둘러 샤워하고 자리를 비켜줬는데 막상 제가 쓰려고 하니 그때는 또 너무 뜨거운 물만….. (웃음) 뭐… 아시잖아요? 네…. 그런 한 주였어요. (웃음)


단디 : (웃음) 그럴 때도 있죠.  우선 제가 어떤 분인지 아직 잘 모르는 관계로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릴게요.


민 : 아, 아직 저를 잘 모르세요? 저는 다 보여드렸는데요?


단디 : 공식 질문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갑자기 울거나 하지는 마시고……


민 : 하… 네. 떨리네요. 그럼 리액션 잘 부탁드립니다. 아아. 흠. 용띠이고요. (??) 바이오 회사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단디 : 아, 용띠 시구나...(웃음) 네. 최근까지 담당하셨던 파트가 선천성 유전 질환이나 태아의 염색체 스크리닝, 유전성 암 감수성 검사 같은 임상진단 부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임상서비스 부문 매출 신화의 공신이시라고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임상진단*이면 병원 쪽으로만 서비스되는 상품인 건가요?

*임상진단 clinical diagnosis 질병의 치료, 예방 또는 진단을 위한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검사하고 정보를 종합하여 제공하는 것


민 : 네. 작년까지 임상진단 서비스 해외팀에서 근무했어요. 환자가 엔드 유저이고 병원을 통해 질병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보니 정확도가 매우 중요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파트입니다. 또 임상진단 서비스 자체가 신규 부문이다 보니 Direct/Indirect sales나 Pre/Post sales 기준도 없었고, 마케팅 가이드라인도 없었어요. 근데 제가 워낙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정말 즐겁게 일했습니다. 공부할 때도 약리학(pharmacology)을 가장 좋아했어요. 화학적 성질이 작용을 이해하는 지점이 흥미롭더라고요. 일에서도 아이디어가 시스템으로 구현되고 연결될 때 희열을 느껴요. 그러다 보니 매출은 자연히 상승 곡선을 탔고요.

단디 : 이과 계열이 아닌 분들에게는 '임상진단'이라는 용어부터가 낯설 거예요. 저도 문과생이라 처음에 [임상]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게 뭐지' 싶었거든요. 그럼 민 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쭉 이과 공부를 해오셨던 건가요?


민 : 아니에요.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과학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문과 특성화 사립형 외고였어요. 저는 영어 중문학과였죠. 어릴 때부터 언어를 좋아해서 '크면 외교관이 돼야지' 하고 꿈꿨던 걸로 기억해요.


단디 : 아, 고등학교 때까지는 문과생이셨네요. Medical Science(의과학) 전공으로 호주에서 학사 과정을 밟으신 걸로 아는데요. 그럼 유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교차 지원을 하신 건가요?


민 : 사연이 좀 길어요. 학창 시절에 방황을 좀 했어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는데요. 어른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하고, 자존심은 세서 공부는 또 어느 정도 하는 그런 학생이었죠. 외고를 가면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어머님이 저를 학교에 데려다주셨고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선배들이 저를 빙 둘러싸고 구타를 시작했어요. 입학식도 하기 전이었죠. 유난히 눈에 띄는 학생이었나 봐요. 제가 모범생처럼 생기지는 않았잖아요. 그때부터 등교하면 선생님, 끝나면 기숙사에서 선배들한테 맞는 생활이 시작됐어요. 종 치기 3분 전인데 교실에 안 들어갔다고 뺨 맞는 일은 비일비재했죠. 한의원에 가서 다리 양 쪽에 굳은 피를 부항으로 빼고 그랬어요.


단디 : 아... 선배에 선생님까지요? 그 정도면 정상적인 학교 생활은 어렵지 않나요?


민 :  제가 그 학교랑 어울리는 학생이 아니라서 자퇴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거였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았지만요. 한 달 만에 기숙사를 뛰쳐나왔어요. 근데 또 부모님께 혼날 게 걱정돼서 집으로는 못 가겠더라고요. 그렇게 며칠째 학교를 결석하고 있었죠.


단디 : 저라도 뛰쳐나왔을 거예요. 감히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고통이 아니네요.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됐나요?


민 : 친한 형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친구가 어머니한테 연락을 했나 봐요. 찾아오셔서 당장 학교로 돌아가라, 자퇴하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마냥 감싸주시고 위로해주셨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도 한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 말대로 학교로 돌아갔어요. 방황은 했어도 아주 나쁜 아들은 아니었나 봐요. 학교로 가기는 했는데 그 날로 기숙사에서 쫓겨났어요. 그때부터 고시원에서 살기 시작했고 창문이 없다 보니 밤인지 낮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깊이 잠을 못 자는 게 몸에 베여 지금도 자다가 잘 깨요.

캔버라 국립 대학교

단디 : 음... 아무리 강경한 부모님 뜻에 학교로 돌아갔다 해도 졸업까지는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요. 마음 잡고 공부를 하기는 더 어려웠을 테고요.


민 : 여차여차해서 고3까지 갔고 반장도 하게 됐어요. 태생이 리드하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당시 같은 반 친구가 가출을 했는데 제가 잘 타일러서 학교로 다시 데려온 일이 있어요. 그때부터 '고3 되니까 너가 달라졌다. 소문처럼 나쁜 애가 아니구나'하면서 저를 대하는 분위기가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그대로인데 주변 시선만 달라진 거죠. 야자가 끝나면 담임선생님이 고시원 근처까지 차로 태워주시기도 했고. 하루아침에 차별받는 학생에서 편애받는 학생이 된 거예요. 그러다가 담임선생님이 학교에 입김을 넣어서 다시 기숙사로 들어가게 해 줬어요. 그때 배웠죠. '아. 세상에 법은 없구나.'하고. 자존심 때문에 전교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고 가장 마지막에 하교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단디 : 어린 나이에 큰 상처로 다가왔을 텐데 그 시간을 꿋꿋이 버텨냈네요. 수능 성적은 잘 나온 편이었나요?  


민 : 수능날 경찰 오토바이 타고 수험장에 가는 수험생, TV에서 보신 적 있죠? 제가 바로 그 학생 중 한 명이예요. 배탈이 났고 수능은 망했죠. 수시는 출석률이 안 좋아서 제대로 쓰지도 못했고요. 남들 다 가는 대학, 내가 원하는 대학을 못 간다 생각하니 처음 느껴보는 무소속감에 망연자실했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군대로 갔어요.


단디 : 근데 왜 재수가 아니라 군대였어요?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욕심이 나서 재수할 법도 했을 텐데요.


민 : 제가 방황하는 걸 이미 보셨으니 부모님은 군대 갈래, 절에 들어갈래 물어보셨어요. 저도 고3 때처럼 공부할 자신은 없더라고요. 말년 병장쯤 되니 나는 뭘 잘하는 사람이지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언제부터인가 병사든 간부든 저한테 와서 고민 상담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심리학의 근원지 미국으로 가야겠다 결심하고 말년 휴가 나와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바로 반대하셨지만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심리학이 대중적인 학문도 아니었고, 엉뚱한 공부 말고 빨리 사회에서 자리 잡고 부를 축적하기를 바라셨어요. 근데 제가 누구예요. 이미 토플 학원은 다니고 있었죠.


단디 : 우와. 잠깐만요. '나 상담 잘해. 심리학 공부할래, 그럼 근원지 미국 가야 하니까 토플 공부 시작.' 이렇게 고민은 바로바로 건너 띄고 실행부터 하신 거네요. 우물쭈물하는 거 없이요.


민 : 고민만 하고 미련 남기는 걸 제일 싫어해요. 깊이 생각 안 하고 저지르는 성격이죠. 해보고 안되면 그때 접어도 되니까.


단디 : 도전해서 실패하면 경험이 남고, 안 하면 미련만 남죠. 근데 미국에서 호주로 항로가 바뀌었네요?


민 :  이때도 사연이 조금 복잡한데, 당시에 첫째 누나가 시드니에, 둘째 누나가 멜버른에 있었어요. 서로 나이 차이도 있고 한국-호주 떨어져 지낸 지 꽤 시간이 됐던 터라, 우리 가족 한번 모여보자 하면서 시드니로 가게 됐어요. 첫째 누나가 임신 9개월 차일 때 호주에 도착했는데, 조카가 태어났을 때 그 희열, 행복감은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 의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호주는 한국보다 의료 시스템이 안 좋고 인맥 위주거든요.


단디 : 이민 사회에서 의사로서 가족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거군요. 음, 그렇지만 호주도 상위 몇 % 안에 드는 학생이 겨우 들어가는 게 의대이지 않나요? 거기서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민 :  운이 좋게도 아이엘츠(IELTS) 한 달 준비하고 준비한 서류를 넣었는데 시드니 대학교 물리치료학과에 합격을 했어요. 학사 학위를 갖춘 상태에서 의학전문대학원(medical Education)으로 진학하는 코스였죠. 근데 운명의 장난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검색해보면 나올 텐데…2011년에 부산저축은행이 부도가 났고 부모님께서 학비로 주시려고 넣어둔 돈 전부가 날아갔어요. 입학금을 못 냈으니 당연히 입학은 취소됐죠...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카페

단디 : 하... 저도 그 사건 알아요. 은행 부도라니요. 합격의 단꿈을 느껴보기도 전에... 부모님도 경황이 없으셨겠어요.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민 :  일 년 늦춰졌다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지내라고 하셨어요. 뭐라든 해야지, 돈부터 벌어야겠다 싶어서 일자리가 있다는 말만 듣고 시드니 남서쪽에 있는 캔버라(Canberra)로 갔죠. 근데 거기에 국립대가 있고 마침 의학과(Medical Science)가 있길래 바로 서류 넣고 입학했어요. 시드니에서는 시드니 대학이, 서울에서 서울대가 제일 좋은 것처럼 그 지역 국립대면 좋은 건 줄 알았어요. 연방 국가라서 주마다 법도 다르고 정착하려는 주에서 공부해야 네트워킹이 된다는 것도 몰랐죠. 제 나름대로는 부모님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쓰리잡 뛰면서 공부했어요. 서브웨이, 카페, 새벽에는 호텔 화장실 청소. 하우스 셰어로 약간의 돈만 지불하고 다른 사람 집 부엌이나 베란다, 거실에서 지냈어요. 그때 교내 인종차별도 심했는데 신입생일 때 동아리마다 홍보 전단지 주잖아요? 그걸 자기네들끼리 여러 장 모으더니 제 머리 위로 뿌리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한 장씩 다시 다 주웠어요. 뒤돌아보니 수십 명이 웃고 있길래 누가 뿌린지는 모르겠고 웃다가 눈 마주친 백인 남자애한테 집어던졌죠. 그때부터 아무도 제 주변에 안 왔어요. 동양인이면 당연히 자리를 피하거나 주눅 들 줄 알았는데 덤비니까 놀랜 거죠. 제가 지나갈 때마다 매드독, 매드독 하면서 웃기만 하더라고요. 미친개(mad dog)라는 말이죠.

인종차별으로 계란을 맞은 날

단디 : 인종차별은 안 겪는 게 가장 좋지만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셨네요. 무시하는 게 안전한 경우도 있지만 그때의 용기가 약자라는 편견을 깼으니까요. 문과생이 이과 공부를, 그것도 영어로. 체력 소모가 굉장했을 텐데 학업이랑 쓰리잡을 병행했으면 몸도 많이 상했을 것 같아요.

 

민 :  수업 하나를 fail 하면 체류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선택지가 없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우울증 상태였는데 그때는 전혀 몰랐죠. 내가 살아왔던 지난 삶 때문에 벌을 받는 거다. 밥 먹을 자격도 없다. 잠잘 시간도 아깝다 생각했어요. 매일 슈퍼에서 파는 똑같은 빵만 사 먹었고 잠도 1년 가까이 제대로 자지 않았어요. 온 얼굴은 화농성 여드름으로 뒤덮였고 원형 탈모도 심각했어요.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서 20명 중에 한 명으로 졸업했지만 이력서를 400장 돌려도 연락 오는 곳이 없더라고요. 대학 생활하면서 지역 봉사도 하고 병원 연계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저는 화장실 청소를 했으니까 매력적이지 않은 지원자였던 거죠.



단디 : 여유를 갖고 구직하고 싶어도 비자가 말썽이었겠어요. 학업이 끝나면 학생 비자도 만료되잖아요.


민 :  맞아요. 이후로 약국 관련 비즈니스로 일을 시작하면서 약학 대학원을 준비했는데 결정적으로 비자법이 바뀌면서 더 이상 호주에서 체류하는 게 어려워졌어요. 한 번은 호주 영주권 신청 가능 직업군에서 약사가 제외되면서 계획이 틀어졌고, 한 번은 간호사가 되어도 주정부에서 지정한 지역에서 2년 이상을 살아야 한다는 비자법이 신설되면서 계획이 또 틀어졌죠. 10년째 호주가 나를 밀어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지쳐있었죠. 더 늦기 전에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어서 한국행을 선택하게 됐어요. 지금 회사와 연결이 되고 채용이 확정되면서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단디 : 평소에 워낙 유머러스한 분이시라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셨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넋 놓고 하늘을 원망해본 적은 없나요?  


민 :  모든 게 제 선택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책임지기 벅찬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결국에는 다 필요했던 경험이 됐어요. 20대 때 있던 특유의 오만함이 다듬어지기도 했고, 무자비한 인종 차별, 폭력 속에서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내공도 쌓였고요. 지금 회사에서 누가 육두문자를 날린다고 하면 불쾌하긴 해도 그게 저를 뚫고 들어오진 못하거든요. ‘일 욕심이 많아서, 열정이 과해서 저러나 보다’ 하고 무덤덤하게 넘겨요. 어차피 회사에서 인간관계는 실적이 좋으면 개선돼요. 논리 없이 말꼬리를 잡는다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시군요’하고 대화를 안 이어가고요. 준비한 도넛이 크네 작네 같이 업무 외적인 걸로 불필요한 트집을 잡으면 그건 공론화시켜요. 회의록에 꼬박꼬박 남기고 주간 회의 시간에 주요 업무처럼 진지하게 결과 보고해요.


단디 : 그러면 그쪽에서는 화 나도 부끄러워서 반박하진 못하겠네요. 여러 에피소드를 듣고 보니, 맞서 싸우는 순간을 빼고는 거의 항상 유머러스하신 것 같네요.


민 :  한국 들어와서 감사하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삶에서 99%를 해야 되는 일로만 채우고 만족하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해야 되는 일 말고 재미있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스키도 처음 타보고, 등산도, 클라이밍, 볼링도 처음 해봤어요. ‘아,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를 요즘 느껴요. 그래서 이번 해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보자’가 목표예요.


단디 : min님 클라이밍 할 때 표정이 정말 순수한 행복 그 자체였는데, 정말 그렇게 느끼고 계셨던 거네요. 인생에서 목표도 필요하지만 나를 '무언가를 해야만 인정받고 행복한 존재'라고 규정지으면 에너지는 어느 순간 고갈되더라고요.


민 :  맞아요. 아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인생은 마라톤 같은데 너는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사는 것 같다. 누구한테나 주어진 에너지는 똑같다. 낭비하지 마라.” 최근 들어서야 열정을 과소비하지 말아야겠다, 깨달았는데 ‘이미 지친 게 아닌가, 버틸 힘이 있나?’ 하는 고민도 있어요.


단디 : 이제는 힘을 빼고도 삶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지난날의 배움을 써먹을 때가 아닐까요?


민 :  그러네요. 사실 지난 2~3달 정도 108배 수련도 해봤거든요. 일에 모든 걸 거는 사람이 되지 말자 하면서요. 근데 그것조차도 애쓰는 일이더라고요. 내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더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고요. 대신 일로 99%가 아니라 30은 취미, 30은 연애, 이렇게 분배를 해야겠죠. 이제 인생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에필로그


놀랍게도 삶은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시간을 선물해준다. 마치 밤사이 머리맡에 놓인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아침에 눈을 떠보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아팠던 시간들은 천천히 흐르는 구름처럼 어느샌가 흩어져 사라져 있다.


그때의 아픔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주는 의미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이 주는 선물을 한 아름 받아 들고나면 새로운 날로 걸어갈 준비는 자연히 끝난 셈이다. 혹시 지난 날을 경주마처럼 빠르게 지나왔다면, 경기가 끝난 후에 경주마에게도 사려 깊은 사랑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경기는 삶의 일부니까.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힘을 빼기에는 분명 짧은 시간이다. 한번쯤 짚고 가보자. 오늘 저녁, 현관문을 들어설 때 느끼는 피로감이 뿌듯함이 아니라 공허함에 가까웠다면, 중요한 걸 놓치면서 달려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앞으로 마주할 시간 속에서는 스스로를 조금 더 편안하게 바라보고, 애쓴 내가 쉴 수 있도록 따뜻한 조명을 마음속에도 은은히 켜 두기를 바라본다. 더 멋진 인생 경주를 위하여.




2020.05.15

스승의날, 테헤란로에서 토닉워터만 세 병째 마시며

네. 앞으로는 그냥 생수로...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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