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프링(2014)> 리뷰
내가 아니라 내 몸이 결정하는 사랑
※스포일러 포함
저스틴 벤슨 감독의 <타임루프 : 벗어날 수 없는>을 보고 나서 그의 다른 작품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작품이 특출 나게 소름 끼치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혹평도 호평도, 간단한 리뷰도 굳이 남기기 모호한 작품이었다. 타임루프 소재를 찾아보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우중충해서 이 감독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왓챠피디아에서 확인한 <스프링>의 예상 별점은 2.9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장르는 무려 '공포/로맨스/SF'였다. 이 세 장르가 동시에 묶인 영화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핑계 대면서 감상을 미루었는데, 주말 오후 낮잠이 망해서 재생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맞았다.
<화차(2012)>처럼 연인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이어지는 스릴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뒤에 SF가 붙었다. 에반이 이탈리아에서 첫눈에 반한 루이스는 퍽 인간답지 못한 괴물이었다. 크리처물이야?! 아름답게 묘사되는 뱀파이어도, 구미호도, 적당히 시체 분장을 한 좀비 수준이 아니었다. 불규칙적으로 몸이 터지고 촉수가 나오고 비늘 붙은 꼬리가 나오는 괴물이었다. 왓챠에서 제공해 주는 포스터로는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하기 이미지 참고) 나는 당황해서 영화를 끝까지 보기로 마음먹었다. 러닝타임이 2시간도 안 되니까 괜찮았다. 낮잠이 성공했으면 어차피 날아갈 시간이었으니.
그간 작가들이 그린 영생의 존재는 매우 지쳐있었다. 몇천 년 살아 재끼는 불로장생에게 인간이란 적당히 늙고 병들고 사라지는 존재니까. 사랑하던 사람을 다 보내고 혼자만 누리는 젊음은 그리 즐겁지 않은 것처럼 말하더라고. 그런데 루이스는 영생을 위해 20년에 한 번씩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고작 일주일 만난 남자 때문에 영생을 포기할 것 같느냐고 쏘아붙이기도 한다. 2천 년을 산 존재가 몸소 겪은 인류의 역사를 간편하게 강의하기보다 과학을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2천 년 먹은 과학도 루이스도 신이 어렵다고 했다. 그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그렇지만 교회는 예뻐서 좋아한다고. 너무나 인간다운 열정과 인간다운 이유로 웃겼다. 2천 년을 살아도 사람은 버겁고, 믿음은 난해하고, 사랑은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70년 살 거면서 뭘 그렇게 아득바득 성취하고 완료하고 알아내려고 하는 걸까. 한낱 미물의 집착이 귀여워지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 에반은 그리 매력적인 남성은 아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잘생긴 것도 아니고, 언변이 훌륭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로맨스가 개연성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안다. 그런데 애초에 사랑에다가 개연성을 찾는 건 좀 이상한 일 아닌가. 루이스는 에반이 그냥 그래서 좋았을 것 같다. 2천 년 동안 지켜봐 온 미물 군상 속에서 저런 허접하고 솔직한 인간이라면 좀 귀여웠을 것 같기도.
농장 주인 할아버지는 일찍 떠나보낸 부인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긴 시간이 지나도, 떠난 지 오래되더라도 유지되는 사랑의 무거움과 아름다움을 투영하라고 판을 깔아준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자극적인 콘텐츠에 절여진 탓에 덜덜 떨었다. 부인의 사진이 너무 어릴 적 사진에서 멈춰있는 게 마음에 걸렸고, 혹시 그 얼굴이 루이스와 같지는 않은지 혼자 열심히 궁리했다. 일찍 요절한 줄 알았던 부인이 자기 농장에서 불법 체류 중인 미국 놈의 여자 친구가 된 거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당하고 가능한 전개라고 생각했으나, 감독은 할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지길 바라지 않은 것 같았다.
에반과 루이스는 고대 로마 유적을 돌아보면서 루이스가 2천 년 동안 살아온 역사와 그가 발견한 과학적 이론의 근간을 나눈다. 루이스가 발견한 기로는 꽤 로맨틱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줄기세포가 필요한데,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 두 가지 이론적 방법이 존재한다.
1. 20년에 한 번씩 임신해서 그 태아의 배아줄기세포로 DNA 절반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방법.
루이스는 이 방식으로 20년*1000번 동안 탈피해가며 영생을 유지해 왔다.
2. 사랑에 빠지게 하는 옥시토신 호르몬을 느껴서 상대방의 성체줄기세포를 취하는 방법.
루이스는 2000년 동안 옥시토신을 분비한 적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배아줄기세포만 취한 것이었다 ! ...
영생의 존재가 과학 이론을 기반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게 신선했다. 그리고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하는 반려자만 찾으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임신하고 살 수 있다는 것도 로맨틱했다. 나는 이 영화가 재수 없고 척박한 로맨스라서 마음에 좀 든 것 같았다.
에반은 루이스의 몸이 고른 줄기세포를 알지 못한 채 마지막 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이때 에반은 진자 눈치 없고 유치했는데, 루이스가 이때 이미 옥시토신을 분비하고 있었나 보지) 흉측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날 루이스를 감안하고서라도 일주일 이후의 태양을 함께 맞이한다. 에반은 활화산과 여명 아래에서 줄기세포 결과를 기다린다. 눈으로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랑이라니 너무 잔인하면서 낭만적이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을 반의반도 담지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멋없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로맨틱한 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화산까지 폭발시켜 가면서. 그렇지만 루이스가 옥시토신을 분비했다면 그것도 다 아름다웠을 테지. 이게 <스프링>이 너무 로맨스 영화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