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 신기술인 증기기관이 발명되었을 때로 돌아가 보자. 증기기관 기술을 활용하여 대량생산을 위한 공장의 선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투자증권(주식, 채권)이 탄생한다. 투자증권의 탄생은 화폐금융만을 알고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개념의 화폐가 등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투자증권이 화폐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야 쉽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처음 투자증권이 출현했을 때 투자증권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을 것이다. 가장 극단적 주장이 기존의 화폐가 곧 사라지고 투자증권이 화폐를 대신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새로 탄생한 투자증권에는 액면가와 더불어 배당수익에 대한 미래가치가 있으니 화폐(교환가치)와 수익(투자가치)이 병행하는 새로운 개념의 화폐가 탄생했다는 믿음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채권과 주식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금융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새로운 화폐가 기존 화폐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이들이 극단적 사고에 휩쓸려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
2008년 블록체인이 개발되어 이듬해 1월 비트코인이 출시된 이후 10여 년 동안 우리는 같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 명확한 정의 없이 남발된 초기 암호화폐는 시장에서 대부분 고사당하고 만다. 암호화폐를 설계하고 자체 생태계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맹목적이고 극단적 믿음은 아직도 블록체인-가상자산 시장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직도 시대적 흐름이나 사회적 철학에 무지한 이들이 300년 전 주식으로 밥을 사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내년 3월부터 가상자산 관련 거래소 등록 등을 규정한 특금법이 발효된다. 이제 우리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첫째, 이제 크립토 이코노미스트들은 그간의 시행착오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간 가상자산의 실체에 대해 솔직히 알지 못했다. 신기루에 휘말려 섣불리 시장을 상상했다. 린테스트도 없이 생태계를 설계하는 누를 범했다. 4차 산업혁명을 노래하던 미래학자들과 금융 전문가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수많은 이들이 쓰러져갔다. 불법적 거래와 다단계 판매가 시장의 불씨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검증되지 않은 알트코인들은 자신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금을 모으고 펑펑 써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진행이 늦어지면 단순 시행착오일 것이라 합리화했다. 그렇다고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 가상자산의 실체와 역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둘째, 가상자산이 새로운 금융의 시대를 열 것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가상자산은 화폐도 투자상품도 아니다. 아니 가상자산이 화폐일 필요도 투자상품일 필요도 없다. 가상자산은 단순히 편리성만 모아놓은 시스템이 아니라 인류사를 바꿀 새로운 금융영역의 탄생이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과 접목될 가상자산 금융이 탄생해야 4차 산업혁명을 발발시킬 수 있다. 가상자산 금융은 4차 산업혁명의 발화제다. 그렇기에 새로운 개념의 금융이 탄생해야 한다. 기존 화폐나 투자금융으로는 소비자 주도의 4차 산업혁명이 발화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혁신적 금융에 맞는 새로운 금융시스템에 의해 발화되었다. 필자의 저서 ‘크립토 경제의 미래(2009)’에서는 향후 가상자산 금융이 대중주도(Crowd-based) 즉, 대중이 참여하고 공유하여 고루 혜택을 받는 ‘누림 사회(Reciprocal Society)’를 탄생시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지금처럼 화폐나 투자상품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이제껏 없었던 그리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금융이어야 한다. 이 역사적 사실과 사명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두 번째 과제다.
셋째, 새로운 철학적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지금은 정보비대칭 시대가 끝나는 인류사적 변환기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결과다. 이제 정보에 있어서는 평등한 시대가 왔다. 정치 지도자, 교수, 전문가, 학생, 일반인 모두에게 정보가 공유되는 정보의 대칭 시대가 도래했다. 따라서 지난 2천 년간 정보 비대칭 시대를 이끌었던 이원론, 제로섬, 경쟁과 나눔이라는 과거 철학적 원칙을 우리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이제 기존 지식을 대체할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블록체인의 ‘탈중앙화’라는 획기적인 철학이 탄생한 2008년을 기억해보자. 당시 탄생한 ‘탈중앙화’ 철학은 정보 권력이 대중에게로 돌아왔음을 선포한 선언적 성격이 높았다. 블록체인 탄생 이후 10년이 지났다. 이제 기술만이 아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도 ‘탈중앙화 철학’이 고루고루 스며들어야 한다. 이 철학을 곳곳으로 제대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바로 ‘가상자산’이다. 지금 제대로 된 가상자산 금융을 설계해야 4차 산업혁명을 누릴 수 있다.
2021년은 탈중앙화라는 철학적 기준을 4차 산업혁명에 적용될 수 있도록 시행원칙과 규칙, 세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마디로 가상자산은 화폐도, 투자상품도 아닌 우리의 미래를 선도할 그 무엇이다. 필자도 가상자산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인류의 사회발전이론에 의하면 농업혁명을 이끈 ‘화폐금융’은 생산자 중심의 금융이었고, 공업혁명을 이끈 ‘투자금융’은 투자자 중심의 금융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이 다가오는 ‘가상자산 금융’은 탈중앙화 된 ‘소비자(Crowd-based) 중심의 금융’이 될 것이라는 맥은 짚을 수 있겠다.
이제 가상자산 이코노미스트들이 함께 힘을 모아 2021년이 탈중앙화 된 대중주도 중심의 ‘가상자산 금융’의 원년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위해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