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망각한다. 세세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결국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실패하면 악몽이고, 성공하면 추억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벤버지'로 불리는 파울루 벤투(현 UAE대표팀 감독)의 한국 국가대표팀 시절이 전형적인 예다. 현재의 찬사와 달리 그는 재임 4년 동안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첫 번째 위기는 2019년 아시안컵 8강 탈락이었다. 부임 직후 자신의 빌드업 축구를 성공적으로 도입했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대표팀은 대회 내내 상대팀의 밀집 수비에 고전했다. 특히 조별리그 2차전 상대인 필리핀은 6백을 들고 나왔다. 측면에 공간이 나지 않도록 수비수 여섯 명이 터치라인까지 늘어섰다. 선수들이 당황했다. 공은 점유했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저 수비라인을 따라 대여섯 명의 공격수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기존의 공격 방식으로는 수비를 뚫기 어려웠다. 코치진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팬들은 대회 내내 답답한 경기 내용에 가슴을 쳤다.
월드컵 2차 예선,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시간
대표팀의 변화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부터 시작됐다. 상대를 압도하며 무패로 조 1위를 차지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상대의 두 줄 수비를 깨는 방식을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손흥민이나 황희찬이 낮은 위치로 내려와 공을 받으면, 상대 측면 미드필더가 이를 견제하려 나간다. 측면에는 순간적으로 수비수가 한 명만 남는다. 이때 우리 측 풀백이 침투한다. 나머지 한 명도 풀백을 마크하기 위해 따라간다. 이렇게 측면이 열리면 빈자리로 공격수들이 침투한다.
이 전술은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상대 팀들은 이번에도 전원 수비로 우리에게 맞섰지만 8경기에서 득점을 성공하며 일곱 경기를 승리했다. 그 결과 상대팀 전부 중동팀인 조편성에도 불구하고 최소 실점으로 월드컵 티켓을 자력으로 획득했다. 최종예선에서 1패만 기록한 덕에 대한민국은 피파랭킹 20위권에 진입, 포트 3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는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 2차 예선과 최종예선의 난이도는 큰 차이가 있다. 2차 예선을 무패로 이끈 슈틸리케 감독은 최종예선에서 몰락했다.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독일과 스페인을 잡은 일본 대표팀의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도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는 오만과 사우디에게 덜미를 잡히며 탈락 위기에 놓인 바 있다.
벤투호는 달랐다. 아시아팀을 제압하려면 밀집수비를 깨는 방식을 터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를 2차 예선부터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이렇듯 월드컵 2차 예선은 감독의 전술을 실전에 적용하는 첫 무대다. 여기서 성숙한 전술은 최종예선에서 중요한 무기가 된다.
월드컵 2차 예선의 전략적 이점을 날려버린 축협
세대교체도 이 시기에 진행해야 선수들이 팀에 녹아들 수 있다. 대표팀의 평균 연령은 아시안컵 명단을 기준으로 28.03세다. 카타르 월드컵 최고령 팀이었던 이란의 28.9세에 근접했다. 이대로면 대한민국은 다음 월드컵에서 최고령 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월드컵에서 성적이 안 좋았던 팀들은 여지없이 세대교체가 지지부진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1차전 상대였던 우루과이는 35세 이상 선수가 여섯 명이나 됐다.
지금 대표팀을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이유다. 감독 선임이 3개월 째 미뤄지며 월드컵 2차 예선에서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모두 날려버렸다. 반면 우리의 경쟁자들은 아시안컵을 통해 우리를 제압할 전술적 해법을 상당 부분 축적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전처럼 내려서는 축구만 하지 않는다.
새로운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시행착오를 겪을 여유가 없다. 새 감독은 두세 경기만 치른 후 바로 최종예선에 임한다. 축구협회의 독단과 무능 탓에 부임하지도 않은 감독이 벌써부터 궁지에 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