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2008, 마크 허민 감독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
소설과 영화는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예술과 문화와 역사, 사람을 이야기한다.
소설과 영화의 매력은 둘 다 너무나 매혹적이라 우위를 다툴 수가 없다.
소설을 먼저 읽은 후 영화를 보면 내 상상 속의 인물이나 배경이 영화 속의 장면으로 한정이 되는 것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원작 소설이 있는 경우 되도록 영화를 보지 않거나 한참 후에 영화를 보곤 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책으로 읽고 한동안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
전쟁,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토네이도가 8살 소년들에게 어떻게 관통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홀로코스트를 아이 시각으로 풀어낸 영화로 원작 소설 발표 2년 후 영화로 제작되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사 가게 된 8살 브루노. 무료하던 차에 숲 속을 거닐다 철조망을 발견하고 슈무얼이라는 또래 유태인 소년을 만난다. 브루노가 농장이라고 알고 있던 곳은 아유슈비츠 수용소였고, 브루노의 아버지는 수용소장이자 뼛 속까지 나치군이었다. 슈무얼은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어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서로의 처지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두 소년은 전쟁, 학살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한 채 순진무구한 8세 아이였다. 세상의 역사가 회오리쳐도 아이는 아이일 뿐, 친구와의 시간이 더 소중한 소년들이었다.
끝내 자신들에게 닥쳐올 비극을 모르는 채 수용소 내 가스실로 들어선다...
총성 없는 가장 잔혹한 전쟁영화가 아닐까 싶다.
재작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브루노와 슈뮤엘이 수용소 어딘가 여전히 숨어서 뛰어놀 것만 같아 분주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청청한 하늘 아래 잔디 위를 날아다니던 나비들과 곳곳에 피어있던 작고 여린 꽃들이 다가올 죽음도 모른 채 놓지 않은 두 소년의 우정이 다시 되살아난 증거라고 믿고 싶다.
브루노의 호기심 어린 가벼운 발걸음,
슈무엘의 천진난만한 맑은 눈동자,
어린 영혼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던 어른들만의 역사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민족과 조국의 영광을 앞세운 독일 군인의 무서운 신념이 인류를 파멸시킬 때는 당당했다.
그러나, 부메랑이 되어 가족을 파괴시킨 후에 무너지는 모습 속에서 부르노 아버지는 과연 신념을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신념을 위해서 가족의 희생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을까?
남루한 줄무늬 파자마보다 더 초췌한 유대인들의 표정들,
남편이 하는 일을 알고 난 후 유대인들의 표정과 어느덧 닮아있는 브루노 엄마의 표정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비단 총과 칼만은 아니었다.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 그리고 충돌 또한 인간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또한 눈길을 멈춘 장면은
나치 군인들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과 감정 없이 전쟁이라는 현실에 떠밀려 가족과 민족을 학살의 현장으로 떠밀고 있는 줄무늬 파자마 위에 조끼를 덧입은 유대인들의 모습이었다.
때론 한없이 위대하지만 때론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현실에 순응하며, 타협하는 인간들을 무조건 나무랄 수 없는 것은 현실에 발 딛고 살면서 무수히 많은 타협과 순응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어쩔 수 없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들이 모여지면서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한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음에도 고개를 내저을 수 있는 용기가 모일 때
우리는 이 비극을 넘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