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
어린 시절, 외부로 향한 갈증이 많았다. 서울도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을 맘껏 구경하고 꿈꿀 수 있는 특권은 바로 동화책이었다.
TV 외화 시리즈를 통해서 다양한 세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초원의 집', '말괄량이 삐삐' 시리즈는 빼놓지 않고 보았다.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보려고 신문 한쪽에 나오는 방송 편성표를 신줏단지 모시듯 아껴 두었다.
짙은 밤색 차단스 위에 달랑 올라앉아 읽던 무릎을 곧추 세우고 읽던 동화책은 꿀맛이었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작품 [소공녀]를 읽고 인도와 영국을 알게 되었다.
파운드라는 화폐 단위가 낯설면서도 엄청 우아하게 느껴졌다.
인도인 람다스의 다락방 만찬과 선물은 너무나 생생하게 펼쳐져 다락방의 환상을 갖게 된 것도 아마 이 작품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루이자 메이 올 콧의 [작은 아씨들]을 통해서는 미국과 남북전쟁을 알게 되었다.
작품 속 4 자매의 생기 넘치는 하루하루와 현실 속 4남매의 혈기 가득한 하루하루가 비교가 되어서 읽는 내내 부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특히, 둘째 조가 당시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아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내가 조였더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내가 저 자매 중 누구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번질 만큼 재미있었다.
살면서 종종 [작은 아씨들]을 떠올릴 때면 자매들의 은밀하고도 쫀쫀한 연대감과 더불어 "꿈". "장래희망", "내일", "희망"이라는 부푼 단어들이 맴돌았다.
2020년 [작은 아씨들]이 발표된 지 152년이 지났고 작은 아씨들을 읽은 지 30여 년이 흘러 나는 4 자매의 엄마만큼 나이를 먹었다.
영화 속 자매들은 소설 속 캐릭터에 충분히 충실했다.
특히, 조를 맡은 시얼샤 로넌은 소설 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소설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이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작가라는 꿈을 위해 열정을 쏟는 모습, 자신의 호불호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당찬 모습, 시얼샤 로넌이 조의 매력을 더욱 빛나게 했다. 상대역 티모시 샬라메의 존재감이 살짝 흐릿할 정도로. 조를 숭배하듯이 좋아하다가 거절당한 뒤 에이미와 결혼을 결심한 로이의 얕은 마음 깊이에 적잖이 실망했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가 한 편의 소설이다
인생은 나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 과정은 결과와 상관없이 한 편의 소설이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이웃집에 놀러 간 듯한 느낌이었다. 주변 영상은 완벽하게 아름다웠고, 당시의 의상과 집안의 가구와 소품 구경도 재밌었다. 7년간의 시간을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방식이라 지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소설에서 읽어낼 수 없었던 4 자매 엄마 인생이 영화에서는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어려운 형편, 남편의 부재 속에서 개성 강한 4 자매를 각자 색깔 그대로 지켜주느라, 자식뿐만 아니라, 남편, 이웃과 지역 사회를 위해 자신을 감추고, 엄마와 아내와 여자의 이름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단해 보였다.
조를 격려하는 엄마의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 같았다.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에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조의 엄마 역시 고결하고 드높은 꿈을 꾸지 않았을까?
당시 세상과 사회, 관습에 체념하고 순응한 채 엄마로, 아내로만 살아가는 자기 인생에게 건네는 말 아니었을까?
4 자매의 엄마 로라 던의 눈빛이 쓸쓸해보인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1860년대 당시 미국도 가부장적이었다.
여성에게는 참정권도 없었고, 결혼이라는 제도와 남자의 울타리 안에 귀속되길 강요하는 사회였다.
사랑의 끝이 결혼이라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결혼하지 않을 권리를 강력히 요구하는 조,
자신의 신념이 담긴 글을 쓰지만 편집자는 여주인공을 결혼시키던가, 죽이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조의 모습이 19세기에는 용납되기 힘든 시대였다.
그러나, 멕은 오히려 결혼이 자신이 꿈이라고 하며 자신의 꿈을 존중받기를 원한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치뤄내야 할 일들이 두려워 결혼이라는 장치에 숨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레타 거윅 감독이 2020년 재해석한 작품이라 결말이 궁금했는데 결국 자매들의 사랑과 결혼으로 귀결되는 결말은 많이 아쉬웠다. 사랑과 결혼으로 마무리 된 엔딩은 재해석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아씨들] 조를 보고 있노라니 1879년 발표된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노라가 떠올랐다.
인형처럼 살기 바라는 집을 박차고 나와 자기만의 삶을 찾아 나선 노라, 자신에게 역할을 강요하고 한정시키는 남편에게 반기를 들고 냉혹한 현실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노라의 거침없는 삶의 여정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조의 엄마처럼 나도 세 딸을 키우면서 때론 먹먹해지기도 했고, 때론 쓸쓸한 눈빛으로 멍하게 지내던 적도 많았다.
여성, 엄마, 아내라는 주어진 역할에, 처지에, 순응하고, 체념하며 지냈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세 딸들에게 적어도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스스로 이끌어 가는 인생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