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었을까?
"K 씨요...
친하게 지내던 직장 후배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내가 몇 번 지나가다 만난,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인기 많던 한 직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후배는 나보다 늦게 들어와 먼저 퇴사를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입에서는 의외의 인물의 이야기가 나왔다.
왜 나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할까?
귀를 쫑긋하는 나에게 그녀가 이야기를 하였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뭐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 인기 많던 (심지어 교회 오빠인) 직원은 그녀에게 접근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내에 여직원 몇 명들을 골라 요즘 유행하는 PT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나름 운동방법도 공유하고 실적치도 공유하는 등,
많은 도움이 된 동아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이상한 메시지들이 들어왔는데,
요즘 한창 뉴스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그런 내용의 사진들을 그가 갑자기 자기에게 보내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나는 이야기를 듣곤
한참을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분노에 찬 그녀의 얼굴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그 자식 변태예요, 변태~!"
회사를 나온 후 만난 다른 부서의 여직원에게도 똑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이미 한 번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나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지만, 모르는채 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가씨들처럼 보일 정도로 관리에 열심히인 그녀는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 열혈 주부였다.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녀마저 그런 상황을 당했다고 하니,나는 적잖게 놀랐다.
그녀는 그놈과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
이전의 후배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지켜볼 수 있었던 거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많은 피해 여성 직원들이 있었다. 나는 ‘같은 건물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들 중에는
이제 들어온 신입 여직원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 사진들 지금 들고 있어요?"
나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받자마자 지웠어요,
손이 떨려서.
남편도 옆에 있었는데
알았으면 죽이러 갔을 거예요.
어차피 위에 말해봐도 소용없잖아요."
그래도 싸워봐야지 하면서도,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말해봐도 소용없을 거라는 것을.
나는 이전에 알고 지내던 팀장님께 이러한 사실을 넌지시 흘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미안해요. 나도 힘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지방의 한 공기관에서 일했다.
시청 출자기관으로 소위 말하는
'준공무원'의 생활을 누리며 일할 수 있던 곳이었다.
당연히 고용은 보장이 되었고,
내가 사고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정년까지는 무난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요즘 세상에 모두가 꿈꾸는 '좋은' 회사를 나는 이런 사건들을 목격하곤 퇴사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퇴사 후에,
나는 이전 회사에 대해 더욱 많은 것들을 알게 된 기분이다.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궁금할 거 같다.
그 변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건은 의외로 외부에서 일어났다.
자기 버릇 강아지 못주던 그놈이 창업 프로그램에 지원한 한 대학생을 건드린 것이다.
비슷한 짓('그루밍' 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을 하던 녀석에게 폭발한 여학생이 고발해 버린다고 난리를 쳤고, 처음으로 부서의 간부들은 이 사람의 실체를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이 사람의 실체를 알게 된
높으신 분들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한동안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육아휴직' 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 그는 유부남에 애아버지 였다)
1년 여의 시간 동안,
그는 긴 잠수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윗분들은 나름의 계산이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시간이 약' 이니 그렇게 휴가를 보내버리면,
결국 사람들의 뇌리에서 이 이야기는 잊히리라.
그렇게 사건은 작은 소란으로 끝이 나는 듯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시 그 '변태' 직원이 복귀할 시점이 되었다.
그와 같이 일하던 여직원 한 명이 보직이동 신청을 내었다. 알고 보니 그녀도 비슷한 피해를 당해왔던 것이었다.
겁에 질린 여직원,
하지만, 직원들끼리는 소문이 나버린 상황에서 누가 그곳으로 가려하겠는가?
이제 그녀를 통해 회사의 윗분들은,
그런 범죄 행위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합당한 징계를 바라던 그녀의 눈 앞에서,
조직은 그들의 논리를 들이댄다.
증인들이 많이 있지만,
외부로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윗분들은
경징계(감봉) 로 일을 처리하려고 한 것이다.
좌절한 그녀는 결국 '퇴사' 를 하게 되었고,
회사 문을 나와 그녀는 바로 '경찰서' 로 직행했다.
얼마 후 냄새를 맡은 경찰 관계자들이 사무실을 드나들고, 기자들이 취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회사에선 징계위원회를 열어,
그 변태 사원을 '파면' 처분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당당하게 인터뷰 기사가 난다.
"전임 원장 때부터 일어난 사건이었고,
우리는 모르는 일이지만 처리하였다."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었을까?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장군의 딸> 이라는 영화가 있다.
장군 아버지를 둔 한 여장교의 성폭행 피해 사건에 대하여, 수사관(존 트래볼타)이 사건을 파해치는 내용이다.
사건의 초반부에 흑인 부관이 존에게 이런 대사를 날린다.
"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네.
옳은 방법, 그른 방법, 그리고 군대의 방법"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저게 무슨 말이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조직 안에서 일어난 이 사건들을 보면서
나는 '군대의 방법' 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영화에서는 장군이 되려는 아버지가 조직에 부정한 일을 덮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그 피해자가 딸일 지라도 말이다.
내가 보았던 일련의 사건들이
영화와 얼마나 다를까?
조직의 장이란 사람은, 이 일로 자신을 임명해준 현직 시장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사건을 덮기 바빴다.
사건을 인지 했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야 할 간부들은 이 일로 시끄러워질 상황을 상상하며, 피해자들을 회유하고 덮기에 바빴다.
그녀가 주변에 조언을 구하던 동료들은 어떨까?
내가 알기론 대부분의 동료들은 입을 닫고 있었다.
행여나 그 피해가 나에게 미치지 않을까....
내가 아니어 다행이야 라는 안도를 하며 말이다.
더하여,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있던 일을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과 입을 맞추어, 이번 참에 윗사람들에게 눈도장을 받아 놓겠다는 심산이었다.
감사를 해야 했을 상급기관, 시청은 어떠했을까?
이 일을 공론화시키면 결국,
산하 공공기관에 대한 관리부실 이야기가 나올 거고,내가 만든 기관에서 문제가 터진 것이니 더 이상 적극적인 조사를 하지 못한다.
내가 본 피해자들의 면면도 극히 일부일 거다.
(모든 피해자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여러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들이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가만히 있으라" 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보직도 바뀔 것이니,
좋은 직장에 고생해서 들어왔는데,
이렇게 나가면 좁은 바닥에서
이 업계로 다시 올 수 있겠는가?
잘못한 사람은 당신이 아닌데 억울하지도 않느냐,
그냥 버티라고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몇 달의 기간 동안
내가 지켜본 그들의 처리방식을 보면서,
나는 계속 영화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그들만의 방법" 말이다.
사회 여러 곳에서 많은 사건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화계의 나이 많으신 단장님은
손녀딸 같은 단원들을 건드리다 퇴출되셨고,
이름 있던 영화감독과 배우는
비슷한 짓을 하다 퇴출되어 몸을 움츠리고 있다.
금메달리스트 여선수를 건드린 코치는
감방행을 기다리고 있고,
비슷한 짓을 하던 광역단체장은
도망치듯 직무를 던지고 은둔해 버렸다.
그리고 한 분은 의혹만 남긴채 죽음을 택하셨다.
잊을만하면 이런 사건들이 터져 나온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일들이 의외로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도 될 거다.
브런치에 공직생활을 하셨던 한 작가님이
'다시 선택해도 공무원' 이라는 이야기를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의 글에 심각하게
'공무원 조직이 변화할 수 있을까요?' 라는 댓글을 단 적이 있다 (글을 빌려 마음이 상하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이 맞다.
공무원과 산하기관 분들 중에는
선량하고 성실한 분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좋은 사람들도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조직 시스템은 당장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군대식 상명하복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존엄성' 보다는 '조직의 명예'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정의.
조직의 명예는 모른 척 덮는다고 지켜지는 걸까?
일반 기업에서는
승진 과정에서 정리되고도 남았을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올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내부에서는 그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눈감고 귀 막고 버티기만 해도
승진하는 조직에서,
아니면 같이 나쁜 짓을 하면
더 빨리 승진하는 조직에서,
얼마나 좋은 리더쉽이 배양되고
존경할만한 상사가 나올 수 있을까?
어린 직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건,
나이 든 어른들의 의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내 보직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그래서 이러한 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나는 그런 조직들이 벌인다는 자체 감사를 믿지 않는다.
내가 본 공기관에서의 <내부 감사>의 의미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목격자들의 입을 단속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증거물들을 파기해 버리곤,
아무 일도 없이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하게 하는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었다.
그 작업 안에서 피해자에 대한 배려나 보호는 없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공룡들의 시대도
커다란 운석덩어리를 맞으며 한 순간에 엎어져 버렸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운석을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변화를 이끌어낼 운석 덩어리는 바로 SNS 다.
인터넷 댓글에서 성희롱의 기준이 너무 강하다.
'남자들은 뭐만 해도 성희롱이니 아무것도 시키면 안되겠네' 라고 하는 말들을 많이 본다.
맞는 말이다.
직장에 있는 어린 직원들은 노동 계약에 따라,
여러분을 마주하는 업무 파트너이지,
당신들의 개인업무나 보아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자기 커피는 스스로 타서 마시고,
술자리에서 자기 옆에 어린 여직원들 앉히지 말고,
회식자리에서는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고,
같이 산책하자고 불러내지 말고,
이상한 스킨십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이 웃고 있지 않냐고?
한 번 심각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 웃음이 과연 나에 대한 애정의 웃음인지,
내 권력이 만들어낸 강요된 웃음 일지...
(PS : 이런 이들을 공룡에 비유한다면, 예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안해, 공룡들아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