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남겨진 생 자체가 일종의 궁형(宮刑)과 같은 것이라는, 어이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삶 자체를 과대평가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내 생이 그토록 대단하고 화려할 리는 없을 것임을 잘 알기에, 그저 이 삶 자체를 묵묵히 이겨내 보기로 한다. 경련이 이는 것이 아닐까란 착각이 들 정도로 지워지지 않게 얼굴에 남은 웃음 뒤에는 이제는 그래도 만사에 심드렁했던 시니컬한 pseudo - 아나키스트 대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민폐를 끼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충실한 양산형 레-고 부품 같은 사회 초년생의 얼굴이 숨어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는 번아웃의 낌새를 느낄 때에도 얼마 남지 않은 20대의 젊음을 대신 불태워 미래의 빚을 미리 청산한다.
세상은 생각했던 것만큼 더럽고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빠르게 망해가는 것만 같지만, 모든 게 망하더라도 내가 본 지옥보다는 더 이상 나빠질 수는 없을 테니 일단은 더 해보자란 생각을 한다. 일하는 건 즐겁고, 좋은 사람에 대한 믿음 자체는 많은 방해에도 불구 생각보다 흔들림이 없다. 머리에 꽃밭이 핀 게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지만, 그래도 아직은 꺾일 생각이 없다. 부러지는 대신 흔들리며 끝끝내 살아남아 한 판 뒤집기를 꿈꿀 만큼, 나는 아직도 젊고 어리다. 비록 주어진 11분조차 못 채우는 그런 무능력한 인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무쓸모를 못 견딜 만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언젠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지금도 스스로한테 행복이란 말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더 이상은 크게 불행하지는 않기에 이 생애를 꾸역꾸역 감내해나가며 살 희망은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채 백 년이 안 될 이 짧은 생애는 앞으로는 평이하고 평범할 수 있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란, 알 수 없는 자신감마저 퐁퐁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행복하진 않아도, 재미있는 삶은 가능해지지 않을까란 작은 희망으로, 그렇게 또다시 월요일 한 주를 맞이한다.
나는 사마천이 아니고, 사마천이 될 생각도 없다. 그런 위대하고 비참한 시대의 주인공 따위는 되고 싶은 의지도, 될 능력도 없다. 암만 발버둥쳐봐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인간은커녕,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공 자리조차 버거운 조연 9일뿐. 그래도 언젠간 나만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고요한 샛별 아래 화톳불의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씩 해보곤 한다. 잊히더라도 좋으니, 그렇게 차가운 밤공기를 잠깐 머금었다 토해내듯 덥힌 후 신기루처럼 사라질, 짧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잠시나마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때의 그 이야기가 적어도 몇몇 사람의 마음속에는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되기를.
그때까지만, 숱한 죽음 속에서도 이 연약하고 비참한 영혼만큼은 죽지 않고 끝내 이 생을 견뎌낼 수 있기를. 내 안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때까지는 살아있을 수 있기를.
이제 나는 더 이상 '죽지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