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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Jul 09. 2024

대화의 환상

1톤 트럭에서 나직한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레이션 같기도 하고 낭송 같기도 한데 차분하고 품위 있고 감미로웠습니다. 정작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트럭 위에는 감자 박스들이 한가득. 반복되는 음성의 내용은 "오늘 아침에 캔 하지감자입니다. 포실포실 맛 좋은 하지감자입니다. 아직 이슬에 젖어 있습니다." 였어요. 저도 한 박스, 달라고 하려는데 트럭은 멀리 달려가네요. 소리에 취해 구매가 밀리는 경우입니다. 그 녹음은 본인의 것일까요. 몇 번이고 원고를 고쳐 쓰고, 녹음도 하고 또 하며 최선의 것을 고르셨을까요? 판매에 효과적인 녹음은 가격과 상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감자 박스 만 원! 타임특가!" 하는 식으로요.


이번 역은 2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인천시청, 인천시청 역입니다. 녹음이 아닌 것 같아요. 크고 높고 바쁜 음성, 젊은 남자분이십니다. 졸던 승객들이 화들짝 놀라 고쳐 앉습니다. 부족한 잠을 자는 분들이 많으니 조금 나지막하게 말씀하셨으면 좋겠다 싶지만, 졸다가 내리지 못하는 분들 깨우려는 의도였다면 효과 100프로입니다.


음성만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보며 나누는 대화보다 더 풍성한 것 같습니다. 글로 나누는 대화는 더욱더요. 상상과 환상이 개입되니까요. 더욱 나의 취향과 이상에 맞는 쪽으로 조립되는 가건물 같아요. 자세히 알고 나면 실망에 이르는 게 당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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