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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Dec 04. 2020

생각 보다 깊은 곳

끝이 보이지 않아

느낌이야 어찌되었든, 나에게 항암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내가 병원의 주사실을 찾을 때 마다 나보다 많은 양의 항암제 투여를 받으시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편이라고, 나는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위로는 위로일 뿐, 항암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주사 몇개 정도의 양 밖에 되지 않는 항암제였지만 후유증이 없지는 않았다. 


사흘 정도가 지나자 메스꺼운 느낌이 시작되었다. 굉장히 메스꺼운 이 느낌은 무엇인가 체해서 구토가 나오기 직전의 느낌이었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았다. 뭔가 더 화학약품 냄새가 온 몸에 진동하는 듯 했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체한 느낌은 구토를 하고나면 없어지거나 나아질 것 이라는 희망적인 느낌이 있는 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느낌은 한 번 시작되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밥을 짓는 냄새와 음식을 하는 기름 냄새는 참을 수 없었다. 계속 헛구역질이 난다. 식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엇인가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하루종일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것아 너무나 힘들었다. 이러한 오심은 보통 항암 주사를 맞고 난 사흘 뒤 쯤부터 열흘 동안 지속되었다. 


이 끔찍한 오심은 주사를 시작하고 열흘 째 되던 날 부터 차츰 사라져갔다. 그리고 의사선생님께서 경고했던 항암제의 2차 부작용이 시작되었다. 입 안의 온 점막이 붓고 터지기 시작했다. 구내염이라고 했다. 항암제는 몸 속의 세포 중에서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찾아 공격한다. 백혈구도 예외일 수는 없어서, 항암제를 맞고 나면 백혈구 수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때문에 면역력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음식등의 섭취로 인해서 감염이 되어있는 구강 점막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오심은 사라졌고, 입맛이 돌아왔지만 구내염때문에 다시 음식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하루가 더 지나자 뱃 속도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점막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서 아마도 소화기내 점막들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수도 없이 가글을 하고 또 했다. 식사는 조금씩 밖에 하지 못해서 하루에 여섯 끼를 먹었다. 하지만 한 번에 먹는 양이 적어 여섯 끼를 먹음에도 체중은 자꾸 줄어만 갔다. 수술 후 퇴원 전 몸무게가 58kg이었는데, 항암을 받고 부작용을 겪으면서 52kg까지 떨어졌다.


첫 항암이 시작되고 가장 큰 문제는 내 몸이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우울증이었다. 


첫 우울증은 식욕이 떨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밥상을 아무리 보아도 맛있는 음식이 없었다. 아프기 시작하면서 부터 밥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었다. 하지만 이런 다짐보다 현실은 훨씬 더 힘들었다. 간이 되지 않은 음식. 내 입맛에 '맛있다'라고 인식이 되어있는 그 어떤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항암 부작용으로 입맛도 떨어지고 구토증세까지 더해지자 우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점점 신경이 예민해 져 갔다. 나를 돌봐주는 가족들에게 못된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음식 이외에 다른 하나라도 내 마음대로 뭔가 하고 싶었다. 걱정어린 가족들의 충고가 아프지 않은 자의 배부른 소리로 들렸다. 그러다가 문득, 아픈건 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나 하나 때문에.


 신혼임에도 아픈 남편때문에 간병으로 지쳐가는 아내. 갑자기 올라온 어머니를 모시느라 마음이 편하지 않을 아내. 갑자기 휴직을 하고 24시간 내 곁을 지켜주는 아내.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하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생시키지 않고 잘 살겠다고 결혼식장에서 큰 소리로 떵떵거렸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가 금방이라도 도망 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내가 도망쳐 버린다고 해도 난 잡을 명분이 없었다. 그럼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온갖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금방 집어 삼켜버렸다. 너무 미안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남편을 두어서 고생이 많구나. 나 때문에 가고싶은 곳도 가지 못하고 하고싶은 것들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투덜대기만 하는구나. 내가 너무 큰 죄를 짓고 있구나. 


너무 미안해 여보.


아픈 아들 탓에 전남 여수에서 이곳 부천까지 올라와서 타향살이를 하고 계시는 어머니. 당신도 몸이 좋지 않으신데, 아픈 아들의 끼니를 매번 챙겨주시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 철없는 아들이 힘들다고 투덜거릴 때 마다 홀로 눈물을 훔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이제 자식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이제 편하게 대접을 받으면서 사셔야 하는데, 나 때문에 이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는 구나.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내 가족들은 나로 인해서 마음의 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지금 아무 것도 없는데. 아픈 건 나 하나인 줄 알았는데, 내가 대장암 판정을 받은 날로 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병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울증은 나를 점점 더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우리집이 21층이라는 사실. 내가 없어지면 잠시동안 아파하시겠지만, 이 지속적인 아픔으로 부터는 해방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살고싶었다. 지금 힘들지만 행복해 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그만 둘 수 없었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보고싶었다.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팔자주름 가득히 행복해 하는 아내의 모습을. 내 등을 토닥여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싶었다.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나는 죄인이지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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