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또...'
손 끝은 부들부들 떨려왔고, 피가 머리로 쏠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조차 없었고, 그 자리에 그냥 주저 앉고 싶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역시 복직은 무리였나. 먹을 것도 신경 써 가며 조심했는데. 대체 왜. 왜. 왜!!
대장암 이후로 화장실에서 내 임무를 마치고 나면 항상 결과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시작은 '혈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재발이 되지는 않을지. 내가 또 아프게 되는 것은 아닐지. 태연한 척 생활하고 있었지만, 유독 화장실에 들어 가는 것 만큼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볼일을 다 마친 후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몇 번이고 기도를 한 뒤에야 결과를 확인할 용기가 생겼다. 점점 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갈 때 쯤. 내 눈에 선명하게 비친 것은 붉게 물들여 진 변기였다.
다시, 피가...
회사 화장실에서 주저 앉아버렸다. 변기통을 부여잡고 보고 또 봤다.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또... 눈 앞이 캄캄했다. 이 소식을 어떻게 다시 전해야 한다는 말인가.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다. 아내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아니야. 주저앉으면 안돼. 할 수 있어. 해야 돼. 할거야.
가족들의 얼굴이. 아내의 미소가. 동료들의 응원이 떠 올랐다. 그리고, 여기까지 견뎌 온 내 자신에게 아직 아무 것도 확인 되지 않는 상황때문에 무너지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확인 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이게 피가 아닐 수도 있고. 아닌데...붉은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변기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참을 변기를 처다봤다.
"뭐, 어쩌라고! 어쩔건데? 응?!!"
한참을 변기에 대고 욕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낫다. 한결 후련하다. 그래, 뭐 어쩔건데.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사무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머리는 차가워졌지만, 가슴은 아직도 쿵쾅댔다. 이런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 까봐 사무실 자리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들 자기 업무에 빠져 별 다른 낌새를 눈치 채거나 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사실 눈치를 채고 싶은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래. 일단 침착하자.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내가 이전에 봤던 혈변이랑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예전엔 끈적한 붉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 번엔 붉은 물감을 적신 휴지를 변기에 떨어뜨린 것 같았다. 이 두 차이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이전과 증상이 다른 것일까. 부위가 다른 것일까. 내시경을 받은지 불과 3개월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발병할 수도 있는 것일까.
어지러운 머릿 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업무에 집중을 하지도 못하고 마우스로 어만 사내 사이트 이곳 저곳만 클릭해 대다가, 우연히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이상한 글 하나가 걸려들었다.
'진땀 뺐네요. 이거 뭔가요.'
당신은 오늘 무슨 일로 진땀을 빼셨나요. 내 이야기도 꽤 진땀빼는 내용인데, 겨뤄볼까요? 대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본인도 화장실에서 혈변을 봤다는 거다. 요즘은 정말 젊은 환자들이 많다던데, 내 주위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프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정말 젊은 환자가 많다. 증상은 나랑 비슷한 것 같고, 얼마나 마음이 떨릴지. 댓글로 너와 비슷한 동료가 있다고 알려줘야겠다. 내가 아플때 받았던 위로를, 손길을 당신에게도 내밀어줘야겠다.
'아, 그거 레드비트 때문일꺼에요.'
첫 댓글이 눈을 사로잡았다. 비트? 그게 뭔데? 아침에 뭘 먹었었지? 얼른 사내 식당 시스템에 접속해서 오늘 오전에 먹은 착즙주스를 살펴본다.
"레드비트"
저게 뭔데?
'레드비트에 색소가 있어서 변 볼때 까지 색소가 흡수가 안되고 나오더라구요.'
황급히 인터넷 이곳 저곳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거였어? 정말로 레드비트는 색소 성분이 있고, 그 색소가 흡수가 잘 되지 않아 대변에 묻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 때문에 식겁했다는 글도 많았다.
'아...진짜...!!'
입가에 미소가 조금 지어진다. 글을 찾으면 찾을 수록 비슷한 경우가 많고, 더 이상 당하지 않겠노라며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글도 더러 보인다. 큭큭. 나는 사무실에서 미친놈 처럼 킥킥대기 시작했다. 아오. 정말!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에게 낄낄대며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는 착즙주스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아내는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아니야. 괜찮을거야. 라고 중얼거린다. 진정이 잘 되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처음 변기를 확인했을 때 처럼, 아내도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트라우마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지. 우리 가족 모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나는 병원 가는 것. 몸의 이상에 지나치게 반응하게 되었고, 아내는 그런 순간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시간들을 겪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전화를 받았을 때가 찜질방이었다는 이유로 찜질방을 끊으셨고, 아버지는 연락을 받지 않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시게 되었다.
항상 나만 아프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느라 우리 가족들의 상처를 보지 못했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의 상처도 크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당사자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일상으로 돌아가 웃음을 찾아가고 있을 때에도, 아직 나의 가족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안도하고 있을 때에도, 가족들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내 상처는 크고 깊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의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내가 이제 괜찮다고 이야기 할 때에도 조심하라고 일러준 그 말들이, 모두 그 상처때문이었구나.
괜찮아. 이제 나 아프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