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회사동료들과 차를 마시던 어느 날,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했다는 후배가 갑자기 물었다. 순간 "어라?" 하면서 당황했다. 나 분명히 그날 아침에도 운전을 해서 출근했는데, 왜 갑자기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오른쪽이지 헷갈리지?
아마 차에 앉으면 너무나 당연하게 벨트를 매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밟았을 것이다. 브레이크가 어느 쪽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도, 갑자기 브레이크와 엑셀이 어느 쪽인지 생각하려니 바로 답이 안 나왔다. "잠깐만"하고서는 차에 앉아 운전하는 것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니 다리가 습관대로 움직이면서 "브레이크는 왼쪽이야"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퇴근길에 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내일 너희 집 근처에 갈 일 있으니까, 잠깐 들러서 김치 주고 갈게. 집 비밀번호가 뭐야?"
우리 집 비밀번호?? 습관적으로 누르기만 했지, 비밀번호를 누군가에게 알려줄 일이 거의 없었다. 갑자기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비밀번호가 바로 떠오르지 않으니 너무나 당황스럽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계속 비밀번호를 떠올리려 애썼지만 머릿속에서 온갖 숫자가 섞여서 뒤죽박죽이다.
'집 앞에 서서 습관처럼 누르면 될 거야'라며 애써 진정했지만, 집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머릿속이 난장판인 상태였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에 앞서, 내 머릿속에는 낯선 번호와 낯익은 번호의 조합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어떤 것도 "아, 이거였지"라며 명쾌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떠오르는 대로 숫자를 눌러보았지만 첫 번째 실패... 다른 번호를 눌러보는 손 끝에도 자신이 없다...
결국 세 번의 비밀번호 시도를 모두 틀려서 현관 도어록이 삐삑거리며 잠금상태가 되었고, 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집 앞에 있다가는 멘탈만 더 흔들릴 것 같아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달하자, 갑자기 "아"하면서 숫자가 퍼뜩 떠올랐다. 곧장 다시 집으로 올라가 비밀번호를 눌렀더니 다행히 열렸다.
작년에 지인과 이야기를 하는데,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어우~ 진짜 50대가 되니까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가끔 집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난다니까"
그 말을 들을 때는 "뭐 가끔 헷갈릴 수도 있죠"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요즘 내 또래의 주위 사람들이 "사람 이름이 기억 안 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대화를 하다가 연예인 이야기를 하며 "아, 그 사람 이름이 뭐였지? 아 그 있잖아. 아이유랑 사귀는 남자"라는 식이다. 치매 가족력 없이 80대의 정정한 엄마를 둔 내 후배가 사람 이름을 잊어버릴 때 내가 대부분 알려주는 편이었기에, 나의 기억력을 많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집 비밀번호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던 그 순간, 치매 걸린 엄마가 떠오르면서 너무 무서워졌다. 치매 가족력이 없다면 어쩌면 웃고 넘길 에피소드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치매 부모를 보면서 '혹시나'하는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섬뜩하고 무서운 경험이다.
아버지가 치매인 친구가 있다. 요양원에서 아빠 생일 파티를 했다며 사진을 보여주는데, 친구의 아버지는 생일케이크 앞에서도 초점 없이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엄마는 경도인지장애로 증상이 심하지 않던 때라, 가족들 속에서 홀로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친구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으면서도 안타까웠다. 친구에게 물었다.
"혹시 나도 치매에 걸릴까 봐 걱정되지는 않아?"
"사실 걱정되지. 게다가 내가 첫째라서 더 불안한 마음도 있어. 그런데 그 걱정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아깝잖아"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 아픈 사람이 많아진다는데, 나도 병에 걸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살기에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교통사고 날까 무서워서 집 안에서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공포에 흔들리지 말자....
엄마가 요양원 입소 전 혼자 사실 때 약을 잘 안 챙겨드셨다. 엄마에게 드시라고 약을 드려도 "알아서 먹을 건데 귀찮게 한다"며 화를 내셔서 걱정이 많았다. 그럴 때면 언니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나중에 혹시 치매 걸려도 약 잘 챙겨 먹을게"
......
예전에 한참 인기 있던 <시크릿>이나 <운의 알고리즘> 등, '원하는 것을 꿈꾸면 온 우주가 기운을 모아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라는 메세지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이비종교 같은 내용을 왜 읽지? 그냥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니까 인기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이라는 책에서 이 원리를 뇌과학으로 설명하는 부분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네... 저 이과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아이들 목소리 중에서도 내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아채고, 소음에서도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경망이 나의 뚜렷한 목표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꿈꾸는 대로 된다는 것도 꿈과 관련된 정보를 잘 찾아내어 우리가 그쪽으로 가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치매 가족이 있더라도 치매에 대한 걱정에 인생을 좀 먹히기보다, 건강하고 멋지고 여유롭게 사는 나의 모습을 꿈꾸면서 더 강하게 지내야겠다.
그래서 요즘은 언니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언니, 우리는 치매 안 걸릴 거니까 그런 생각하지도 말고, 나이 들어 크루즈 여행 다니며 즐겁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