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 Design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떠오르는 상상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세련된 옷을, 누군가는 손에 익은 일상 도구를 떠올린다. 생활의 무대가 디지털로 옮겨온 요즘은 스마트폰 속의 UI/UX 디자인을 먼저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디자인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우리가 입는 옷부터 매일 마주하는 화면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디자인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단순히 보기 좋게 만드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디자인은 기능을 형태로 치환하는 과정이며, 인간 중심의 행동과 경험,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도시 전체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도시의 모든 요소 또한 디자인의 산물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형태로 드러낸 것을 우리는 ‘공공디자인’이라 부른다.
흔히 길가의 표지판이나 공원의 벤치, 공공화장실 등을 공공디자인의 예로 들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물을 만들 때 결코 외형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누가 이 공간을 사용하는지, 어떻게 이동하고 머무르는지, 나아가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배제되어야 하는지 등 복잡한 사회적 규칙들이 디자인을 통해 실체화된다.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 자체는 비교적 근래의 개념이지만, 그 실체는 역사의 흐름 속에 늘 존재해 왔다. 대표적인 예로 19세기 파리의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 사업(Haussmann's renovation of Paris)'을 들 수 있다. 당시 파리는 대로와 가로등, 상하수도, 공원, 교통망을 아우르는 대규모 정비를 단행했다. 이는 건축적 성과를 넘어 도시 환경을 체계적으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공공디자인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에 들어서며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는 예술과 공예, 건축을 통합하며 기능적이고 사회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 대중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이들의 철학은 공공디자인의 이론적 토대가 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공공디자인은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 철학을 담는 그릇이며,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본질적인 설계 과정이다.
도시 길 찾기 시스템, Legible London
영국의 레저블 런던(Legible London) 프로젝트는 도시를 시민이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든 공공디자인의 기념비적인 사례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런던은 보행자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었다. 30개가 넘는 서로 다른 안내 체계가 혼재되어 있었고, 표기 방식과 지명, 거리 표시가 제각각이라 보행자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심지어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는 걸어가는 것이 훨씬 빠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정보가 없어 시민들이 지하철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역사 내 혼잡도가 높아지는 문제까지 발생했다. 런던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걷기 좋은 도시'라는 정책적 목표를 세우고 대대적인 보행 환경 개선에 나섰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보행자가 도시를 이동하며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지 과정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시스템화한 데 있다. 먼저 도처에 흩어져 있던 지도와 표지판을 통합하여 현재 위치, 방향, 목적지까지의 도보 시간, 주변 연결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구조로 재설계했다. 또한 보행자의 시선에 맞춰 지도의 스케일을 계층화했다. 현재 서 있는 지점부터 인접 지역, 그리고 더 넓은 도시의 맥락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여 사용자가 자신의 위치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게 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랜드마크 중심의 디자인이다. 복잡한 좌표를 나열하는 대신, 누구나 알 법한 유명 건물이나 광장, 역 이름을 중심으로 지도 내 위계를 설정했다. 실제 거리를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경험과 머릿속에 기억되는 장소를 디자인으로 연결함으로써, 지도가 단순한 그림이 아닌 길잡이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든 것이다.
파편화되어 있던 표지판들은 하나의 패밀리(Family) 형태로 통일되었다. 하나의 규격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시각적 문법 아래 설치 장소와 상황에 따라 제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모듈을 개발하여 도시 전체에 일관된 시각적 질서를 부여했다.
레저블 런던은 2010년 SEGD(Society for Experiential Graphic Design)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그 혁신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뉴욕의 워크 NYC(WalkNYC), 시드니의 웨이파인딩(Wayfinding) 시스템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이 이 사례를 벤치마킹하며 현대 도시 공공디자인의 표준이 되었다.
도시 경험을 재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슈퍼블록(Superblock)
바르셀로나의 슈퍼블록(카탈루냐어: Superilla)은 전통적인 의미의 디자인을 넘어 도시 계획과 결합된 공공디자인을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그간 자동차가 독점해 온 도시의 우선권을 사람에게 다시 되돌려주는 데 있다. 바르셀로나는 인구 밀도가 매우 높고 자동차 중심적인 구조 탓에 대기 오염, 소음, 녹지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이를 해결하고 안전하며 건강한 지속 가능한 도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탄생한 아이디어가 바로 슈퍼블록이다.
슈퍼블록의 구조는 명확하다. 기존의 격자형 블록 3x3개를 하나의 커다란 생활권 단위로 묶는 것이다. 블록의 외곽 도로는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게 유지하되, 내부 도로는 차량 속도를 엄격히 제한하고 거주자나 긴급 차량의 진입만 허용하는 구조로 전환했다. 그 결과, 내부 거리의 통행량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자리에 휴식, 놀이, 녹지, 그리고 커뮤니티 활동을 위한 공간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디자인의 대상이 건물의 외관이나 표지판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시 운영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디자인의 본질이었다. 디지털 영역에 사용자 경험(UX) 디자인이 있듯, 거리의 규칙을 재정의하는 것 또한 디자인의 영역이다. 도로의 폭을 물리적으로 크게 바꾸지 않더라도 통행 방향, 진입 규칙, 속도 제한, 그리고 유휴 공간의 용도를 재배치하는 것만으로 공공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디자인을 구현해 낸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슈퍼블록을 단순히 교통 문제로 보지 않고 거주민의 이동, 건강, 기후 변화 대응, 놀이, 인간관계, 상권 활성화 등 일상적 경험의 총합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거리의 주인공을 차가 아닌 사람으로 설정하고, 철저히 거주민의 관점에서 도시를 재설계한 사람 중심의 디자인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슈퍼블록은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 같은 수단은 아니다. 정치적 합의와 행정적 지원, 시민들의 지속적인 참여가 필요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사례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유럽과 세계 여러 도시에서 벤치마킹하는 변형 모델의 기반이 되었고, 사람 중심의 거리 재설계를 위한 글로벌 참조 모델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도심 속 야외 수영장, 코펜하겐 하버 배스(Habour Bath)
과거 덴마크 코펜하겐의 항만은 여느 항구 도시가 그렇듯 산업과 물류, 운송을 위한 거친 공간이었다. 시민들은 물가를 지나다녔지만, 그저 바라볼 뿐 직접 그 물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코펜하겐시는 항만 수질을 꾸준히 개선한 끝에, 1999년 마침내 입욕이 가능한 수준의 수질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항만이 더러운 산업 현장이 아닌, 시민의 놀이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하버 배스(Harbour Bath)다. 2002년 아일랜즈 브루게(Islands Brygge)에 첫 항만 수영장이 문을 연 이후, 현재 코펜하겐에는 14개의 수영 구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제 코펜하겐은 도시 전체가 수영하는 도시라는 독보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가족 단위 방문객부터 햇볕을 쬐는 젊은이들, 산책 도중 가볍게 물에 몸을 담그는 이들까지, 항만은 시민들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일반적으로 수변 공간은 산책하며 감상하기엔 아름답지만, 시민이 실제로 물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어렵다. 난간과 같은 물리적 경계가 분명해 감상의 대상으로만 머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버 배스는 이러한 경계를 과감히 허물고, 보행로에서 자연스럽게 내려가 물에 닿을 수 있는 구조로 디자인되었다. 단순히 물가를 장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과 도시 사이의 연결을 디자인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적 레저 시설을 구축한 것이다. 이곳은 박제된 랜드마크가 아니라, 시민들이 실제로 먹고 놀고 머무르는 살아있는 공공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공공디자인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다. 화려하게 만들어 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하버 배스 프로젝트는 단순한 야외 수영장 조성을 넘어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기 위한 환경 관리 시스템을 정착시켰고, 도시 속 공공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한, 코펜하겐의 도시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며 시민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독일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할 기회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유럽의 공공디자인은 단순히 거리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정교한 설계로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가능성을 최우선에 둔 철학이었으며, 시민들의 실질적인 참여와 라이프스타일에 깊숙이 관여하며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공공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지자체마다 관련 지원 사업이 늘어나고,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그 중요성을 점진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공공디자인을 공공시설물이나 시각적 결과물의 심미성을 높이는 작업으로만 한정해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가로 환경 정비나 안내 체계 개선, 시설물 교체와 같은 사업들이 주를 이루는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시각적인 정비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선을 도시 운영 자체에 대한 설계로 확장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공공디자인을 단순히 보기 좋게 다듬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지속가능성, 주민의 주체적인 참여, 그리고 환경과 시민의 삶이 어우러지는 방식까지 디자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못할 것이다.
공공디자인의 배경이 되는 철학이 넓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도시의 문제를 더 깊게 고민하고 본질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제는 짧은 시범 사업의 성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디자인으로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