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talisum
2024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는 아카데미 시상식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3관왕을 거머쥐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긴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한 건축가의 삶을 비추고, 그 굴곡진 서사를 건축이라는 매개체로 그려낸다.
여기서 '브루탈리스트'는 브루탈리즘 건축가를 뜻하는 동시에, 단어 뜻 그대로 거칠고(Brutal), 냉정하며,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의 시각적 정점은 단연 브루탈리즘 건축물이다. 모든 구조를 가감 없이 드러낸 웅장함 속에는 차갑고도 우울한 미학이 서려 있다. 건축 양식의 특징이 인간의 삶과 맞물려 발현되는 과정을 훌륭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최근 예술과 디자인 분야에서 '브루탈(Brutal)'이라는 용어를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건축의 경계를 넘어 그래픽과 웹 디자인 등 디지털 영역에 이르기까지 이 투박한 언어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브루탈리즘은 언제부터 창작자들이 사랑하는 용어가 되었을까? 본래 현대 건축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대표되던 이 스타일은 한때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하며 이제는 '네오 브루탈리즘(Neo-Brutalism)'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스크린과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그 시각적 문법의 기원은 르코르뷔지에의 후기 건축물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거난 해소를 위해 마르세유에 지어진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이다.
이 건물은 가공하지 않은 거친 상태의 콘크리트, 즉 베통 브뤼(Béton Brut)를 그대로 노출하며 브루탈리즘 양식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보이는 브루탈리즘의 가장 큰 특징은 재료의 가감 없는 노출이다. 이전의 건축물들이 외장재를 통해 실제 재료를 감추려 했다면, 브루탈리즘은 재료 본연의 질감을 과감히 드러낸다.
또한, 건축물의 구조를 숨기지 않고 전면에 내세운다. 건물이 구조를 감싸는 껍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가 곧 건물의 정체성이 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시도들 덕분에 르코르뷔지에는 브루탈리즘 건축의 흐름을 열어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물론 그를 브루탈리즘 건축가로만 한정 짓기는 어렵다. 그는 평생 기능주의와 합리주의를 추구한 모더니즘의 대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후기 작업에서 정립된 개념들이 브루탈리즘의 핵심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꾸미지 않은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건축, 그리고 공동체 주거라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며 주거의 개념을 재정의한 그의 통찰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 유효한 영감을 주고 있다.
전성기와 쇠퇴
재료의 본질을 드러내고 장식을 거부하는 브루탈리즘은 유럽을 넘어 미국, 일본, 동유럽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시기 브루탈리즘의 주된 무대는 공공주택, 대학교, 정부 청사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축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거주하고, 배우고, 협업하는 거대 구조물들이 도시의 풍경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때 핵심적인 구조 원리로 등장한 것이 '모듈화(Modularization)'다. 창문이나 방의 구조 같은 기본 단위를 표준화하여 레고 블록처럼 반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건축 기법을 넘어, 필요에 따라 시스템을 확장할 수 있는 효율적인 주거 솔루션으로 주목받았다. 모두를 위한 건축이라는 사회적 이상을 품은 브루탈리즘은 1960년대 디자인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대 건축물과 공동 주거 시스템을 유지·관리하는 데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관리가 소홀해진 거대 단지는 급격히 낙후되었고, 그늘진 복도와 폐쇄적인 구조는 사회적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실질적인 관리 문제보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인간성 결여에 대한 논란이었다. 거대한 회색빛 콘크리트 덩어리가 주는 위압감은 대중에게 차갑고 비인간적이며 우울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결국 1970년대에 들어서며 브루탈리즘 건축물들은 곳곳에서 철거되기 시작했고, 한때의 혁신은 실패한 건축이라는 낙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브루탈리즘의 부활: 네오브루탈리즘
2000년대에 들어서며 브루탈리즘은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흐름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거친 건축물을 단순히 못생긴 실패작이 아닌, 진정성과 실험 정신을 담은 유산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투박함은 현대적인 기술과 만나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디테일을 갖춘 건축으로 발전했다.
특히 디지털 문화의 확산은 브루탈리즘의 부활에 기폭제가 되었다. 강렬하고 조형적인 건축물의 실루엣이 사진을 통해 소셜 미디어에 공유되면서, 대중들은 이 독특한 미학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건축 역사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어졌다.
이제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네오 브루탈리즘(Neo-Brutalism)'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과 디지털 분야에서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과거 건축이 추구했던 정신이 매일 마주하는 디지털 화면 위에 구현된 것이다. 정돈되고 획일화된 기존 인터페이스에 피로감을 느낀 디자이너들은 의도적으로 두꺼운 윤곽선을 사용하여 내용보다 구조가 드러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시각적 표현 역시 과감해졌다. 비정상적으로 큰 타이포그래피를 배치하거나, 세련된 중간색 대신 노랑, 파랑, 빨강 같은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 대비를 극대화한다. 이는 사용자에게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한 인상을 남긴다.
네오 브루탈리즘은 단순하면서도 의도적인 무질서를 추구한다. 레이아웃을 비대칭으로 배치하고, 버튼에 강한 그림자를 넣어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안티 디자인(Anti-design)적 요소를 유머러스하게 활용한다. 과거의 브루탈리즘이 차갑고 육중한 위압감을 주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네오 브루탈리즘은 친근하면서도 위트 있는 스타일로 변모하여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이탈리아 건축 잡지 <DOMUS>를 보며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곤 했다. 그 속에서 자주 마주친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들은 나에게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과감하게 드러난 구조와 육중한 덩어리가 주는 위압감은 컸지만, 한편으로는 재료를 숨기지 않는 그 솔직함이 현대 예술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한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이 거칠고도 세련된 질감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건축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를 다시 접한 건, UI/UX 디자인이 산업의 중심축이 된 이후였다. 그래픽과 UI/UX 분야에 몸담은 디자이너로서 나는 자연스럽게 '네오 브루탈리즘' 스타일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이 분야를 공부했을 때만 해도 원칙은 명확했다. 사용자의 경험(UX)을 최우선으로 하여, 인체가 느끼기에 가장 적당한 크기와 색상, 위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디자인은 철저히 배경으로 물러나고 기능이 매끄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효율성을 쫓다 보니 부작용도 생겼다. 모든 웹과 앱의 스타일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해진 것이다. 브랜드 컬러와 폰트만 살짝 다를 뿐, 구조와 레이아웃은 변별력을 잃어갔다.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흐름에 반기를 들듯, 정보보다 디자인 요소를 전면에 내세운 네오 브루탈리즘 스타일이 등장했다. 눈이 편안한 색 대신 강렬한 원색을 써서 의도적인 피로감을 주고, 거대한 타이포그래피로 가독성보다 시각적 충격을 우선시한다. 디자인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장난감처럼 기능하는 이 파격적인 스타일은 디자이너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갔다.
나는 건축 전공자는 아니지만, 브루탈리즘이야말로 현대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조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과한 장식으로 스스로를 꾸미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어쩌면 네오 브루탈리즘의 부활은, 본질을 숨기지 않으려는 현대인들의 거침없는 태도가 디자인이라는 거울에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