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의 뇌는 말을 한다

<비밀> 시리즈, 시미즈 레이

by 최기현

박신양, 김아중 배우가 출연한 SBS 의학 범죄 수사 드라마 <싸인>(2011)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들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부검하면서 감추어진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단순히 추리나 감에 의존하여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검을 통해 과학적으로 사망 원인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했는데 그 과정이 꽤 인상적이었다. 또한 시신을 부검하여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한 개인의 삶 전체로 연결,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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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시미즈 레이코가 1999년부터 2012년까지 연재한 <비밀 THE TOP SECRET>은 앞에서 다룬 드라마 <싸인>과 마찬가지로 사망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다. ‘법의 제9연구실’이라는 조사기관은 사망한 사람의 뇌에 전기자극을 가한 뒤 MRI 스캐너를 이용하여 그 사람이 죽기 직전 본 일정 시간의 장면을 재생한다. 뇌에 담겨 있는 시각적인 정보를 확인하여 사망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광경을 목격했는지 확인하여 수사에 활용한다.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은 수려한 그림체에 담긴 잔혹한 묘사가 만화의 특징이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작화는 신체의 내부 구조, 특히 뇌와 장기를 해부학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아름다운 그림체로 그려진 잔혹한 장면 때문에 독자는 그로테스크한 괴기함을 느낀다. 특히 약물이나 정신적 충격을 받아 왜곡된 지각을 경험한 인물들의 시선에는 난데없이 유령이나 헛것이 등장한다. 특히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에 쫓겨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존재가 MRI 스캐너를 통해 독자에게 재현될 때 나오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섬뜩함으로 이어진다.


물론 만화에 나오는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무섭거나 공포스러운 이미지는 아니다. 다만 이러한 환상적 이미지들이 오히려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 포착된 마지막 지각이라는 맥락 때문이다. 뇌에서 재생되는 이미지를 관찰하는 수사관들 이러한 광경을 모니터링하면서 대부분 정신적인 PTSD를 경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화를 읽다 보면 지각의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짜 일어난 사실인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개인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컷 분할과 구도, 명암 대비 등을 통해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지각, 현재와 과거, 살아있는 자의 시선과 죽은 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연결한다. 때로는 동물의 시선도 수사에 활용된다. 프레임 안에 죽은 자의 기억을 배치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수사관들의 시선을 프레임 밖에 배치하여 독자는 관찰자인 동시에 관찰당하는 대상이 되는 이중적 위치에 놓인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수사방식은 윤리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생각하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눈으로 보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굉장히 은밀한 비밀의 영역이다. MRI 스캐너로 인해 인간의 뇌는 이제 가장 내밀한 영역에 있는 비밀까지 낱낱이 드러낸다. 사망사건의 수사를 핑계로 ‘훔쳐보는’ 죽은 자의 프라이버시는 이제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다. 비밀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법의 제9연구실의 수사관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은 자의 마지막 시선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죽은 자의 가장 사적인 순간들, 때로는 범죄와 무관한 개인적 비밀까지 목격한다. 이러한 상황은 수단과 목적 사이의 윤리적인 갈등과 닿아있다.


시미즈 레이코는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는데, 인생의 경험이 유전을 통해 대물림 된다든지, 인간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로봇 등과 같은 기발한 세계관 설정이 눈에 띈다. 작가의 SF적 세계관 설정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은 자의 뇌는 말을 한다. 뇌에 담긴 이미지는 독자에게 잔혹하게 재현되면서 비밀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만화 <비밀>은 단순히 한여름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스릴러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기술 발전의 한계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만화 26호(2025.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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