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놀라 홈즈>
우연히 <에놀라 홈즈>의 예고편을 본 뒤로 그 유명한 '홈즈 가문'의 막내딸이라는 설정에 푹 빠져들게 되었는데요, 넷플릭스 오픈 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오픈하기가 무섭게 관람하기 시작한 영화입니다. 남성들만 가득하던 '홈즈'의 세계관에 '홈즈'와는 결코 애정관계로 엮일 수도 없고 엮어서는 안되는 설정의 막내 여동생이라니! '홈즈'가 가진 명석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겠다 싶어 영화를 보기 전부터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매우 큰 기대감을 안고 시작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솔직히 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에놀라 홈즈>는 엄마의 실종 사건을 메인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 외에도 '튜크스베리 자작'이 남겨준 새로운 사건을 함께 풀어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2시간의 러닝타임을 두 가지 사건으로 꽉 채워 진행합니다. 게다가 영화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회적 배경인 '여성 참정권'과 관련한 이슈들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마구 엮여져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소재들이 쏟아져 영화에 지루해할 틈이 없어요.
다만 개인적으로 좋으면서도 아쉬웠던 점이 있었는데요, '에놀라'와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의 일들을 방해하는 대척점의 서있는 인물들이 모두 여성으로 그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중요 인물들을 여성으로 사용한 부분은 흥미롭고 좋았던 점이지만, 실제 사회적 배경 상 여성 참정권의 찬성 쪽인 '유도리아'(와 의도하지 않았지만 찬성 쪽에 서있던 '에놀라')와 대척점에 서있는 건 여성들보다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더 컸을 텐데 굳이 여성 참정권의 대척점에 서있는 최종 보스가 여자라는 설정은 좀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최종 보스가 여자인 점이 좋기도 하면서요. 게다가 여성 참정권을 찬성하는 지나가던 시민 조연의 목소리는 모두 남성이기 때문에 더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에놀라 홈즈>는 여성 참정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무겁지 않게 소화하며 '에놀라 홈즈'의 모험을 흥미롭게 그려냅니다. '에놀라'는 어린 나이답게 통통 튀는 발랄함과 재치로 영화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잡아주는데요, 홈즈 가문의 막내딸이라는 재밌는 소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지루하지 않고 좋아요. 특히 '에놀라'가 '쓸모없는 소년'으로 불리는 '튜크스베리 자작'과는 달리 문무를 겸비한 모습으로 등장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에 빠르게 대처하고 해결해나가기 때문에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에놀라 홈즈>가 동명의 책 시리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임을 알 수 있었는데요, 원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 곳 없이 꽉 채워 잘 만들어진 영화인데다가, 특히 '에놀라'와 엄마 '유도리아'의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그려져 원작의 다른 시리즈에 대한 궁금증이 치솟게 되더라고요. '에놀라 홈즈' 역을 맡은 밀리 바비 브라운이 홈즈 가문의 첫 대면을 그린 부분을 읽어주는 영상을 위에 첨부해봅니다. 영화를 본 뒤에 이 영상을 보면 훨씬 좋아요.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의 서적 <에놀라 홈즈> 시리즈의 <사라진 후작>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에놀라'가 영국을 휘젓고 다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홈즈 가문을 소재로 하는 만큼, 영화는 엄마가 남긴 수수께끼를 바탕으로 '에놀라'가 사라진 엄마의 행적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에 대해 묘사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쓸모없는 소년'으로 묘사되는 튜크스베리의 자작이자 배질웨더의 후작이 '에놀라'에게 새로운 수수께끼를 더해줍니다.
'에놀라'라는 이름은 혼자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ALONE을 거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요, 이름의 의미에 맞게 영화는 '에놀라'의 홀로서기의 과정을 함께 보여줍니다. 뭐든지 엄마와 함께 하며 엄마에게서 유용한 기술들과 지식들을 배운 '에놀라'가 갑작스럽게 떨어진 엄마에게서 독립하여 홀로 서는 과정, 그리고 탐정으로서 처음 의뢰를 수행하며 홀로 성장하는 과정들이 어색하지 않게 영화 안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에놀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가지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나가는 과정도 즐겁지만 영화 중간중간 관객들과 소통하는 듯한 순간순간이 있어 재미를 더해줍니다. 단순히 내레이션을 사용하여 '에놀라'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과 대화하며 현재 상황과 자신의 심리 상태에 대해 설명해 줘서 '에놀라'라는 인물에 대해 훨씬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줘요.
<에놀라 홈즈> 속 '에놀라'가 가진 지식과 명석함, 관찰력, 체력, 주짓수 실력 등은 모두 엄마에게서 교육받고 발전시켜진 것들입니다. '에놀라'는 당시 여성들이 받는 교육들과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요, '에놀라'가 엄마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엄마가 남겨준 기술들이 적재적소에 활용되는 것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에놀라'는 자신이 몰랐던 엄마의 모습에 대해 알게 되고, 엄마를 찾아도 되는지 의문을 갖기도 해요. 이때 '튜크스베리 자작'이 더한 수수께끼에 휘말려 들게 되면서 엄마 찾기 여정에서 삐끗 벗어나 자작의 사건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런던까지 와서 엄마를 찾던 '에놀라'의 목표가 '튜크스베리 자작'에 의해 흐려지면서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는데요, 결국 전체적인 스토리상 '튜크스베리 자작'을 돕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엄마의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에놀라'의 의도는 아니었지만요) 두 여성이 각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수행한 것이 됩니다. '에놀라'의 엄마의 실종 사건과는 아무런 접점 없어 보이는 '튜크스베리 자작'의 사건이 영화 안에서 한 군데의 접점을 가지고 몰아지는 것을 보면, 굉장히 잘 만들어진 추리 소설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에놀라 홈즈>는 유명인 홈즈 형제를 극 중에 끌어당기기는 하지만 이들의 극 중에서의 위치가 조연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유명 인사들을 극 중에 조연으로 활용할 경우 조연과 주연의 경계가 무너져 주도권이 흐려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 영화의 경우 그런 실수 없이 철저하게 '에놀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좋았어요. <에놀라 홈즈>는 철저히 여성 주인공을 바탕으로 <셜록 홈즈>와 동시대의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로, <셜록 홈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 작품들의 남성주의적인 시선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작품에서 너무나 멋지고 흥미로운 인간 군상으로 묘사되었던 홈즈 형제의 경우 <에놀라 홈즈>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재창조됩니다. 이는 물론 '에놀라'가 홈즈 형제의 막냇동생으로 설정되어 현실 남매 같은 다툼 모먼트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매 렌즈에서 벗어나더라도 객관적인 시대상을 바탕으로 이들 형제를 바라볼 기회를 영화에서 제시하는 셈입니다. <에놀라 홈즈>는 홈즈 형제에 대해 기존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으로 이들을 해석하여 익숙한 소재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시켜 눈길을 끕니다.
●●●●○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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